다시 ‘자본론’이다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지난 1천 년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평가받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ㆍ이하 『자본론』)이 최근 한 경제학자에 의해 새로운 날개를 달고 세상에 나왔다.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본 『자본론』은 많지만 독일어 원전이 번역돼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87년 서슬이 시퍼런 독재정권 하에서 1권이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 20년 넘게 이어져온 길고 긴 여정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그 한 가운데에 우리 대학교 강신준 경제학과 교수가 있다. 『자본론』에 묻혀, 혹은 『자본론』과 함께 살아온 그에게 소감을 묻자 “20년 넘게 지고 있던 짐을 이제야 일부나마 내려놓은 기분”이라고 입을 열었다. 최근 강 교수가 마르크스의 원본 『자본론』 5권을 번역해 출간했다.
철학자를 꿈꾸던 19살의 소년이 경제학자가 되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철학도가 경제학도가 되기까지
강 교수가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선 ‘독서신문’이라는 사상교양서가 유행했는데, 유독 그의 관심을 끈 대목은 사회철학 분야였다. 프랑크프루트학파에 심취한 그는 프랑크프루트연구소가 있는 독일에서 공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독일로 유학을 가려면 우선 언어 문제를 해결해야 했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독문학과에 입학하자였어요.”
어린 나이에도 꿈이 분명하고 당찼다. 그리하여 강 교수는 고려대학교 독문학과 74학번으로 입학했다.
강 교수가 독일 유학을 계획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의 누님 덕분이었다. 강 교수의 누님은 1969년 파독 간호원의 거의 마지막 세대로 독일을 찾았다. 누님은 그곳에서 독일인 남자를 만났고 프랑크프루트와 가까운 한 소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자형(누나의 남편)은 자택 귀퉁이에 강 교수가 혼자 지낼 수 있도록 작은 독채를 마련할 만큼 그의 유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대학시절 그의 인생에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동백림 사건(1967년 예술인과 교육자, 공무원 등 194명이 동백림을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벌였다며 처벌당한 사건. 동백림은 당시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을 한자로 음차한 것)에 휘말려 서울대 교수로 내정됐다가 하루아침에 사형선고를 받게 된 임석진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다행스럽게도 임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자유의 몸이 됐다. 명지대에서 교양철학 수업을 맡게 된 임 교수는 자신이 가진 전문지식을 전수해 줄 제자를 찾았고,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공부팀이 꾸려졌다. 임 교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2세대를 대표하는 하버마스와 함께 수학한 사이로, 사회철학의 본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매주 토요일 당시 남산에 위치한 국토통일원에 모여 공부했다. 팀원 중 한 명이 국토통일원의 차관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르크스의 ‘법철학 비판’을 접하게 됐습니다. 근데 무척 재밌는 거예요. 그렇게 점점 경제학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자본론, 20년을 이어온 만남
독일로의 유학은 예정대로 진행돼갔다. 그러나 독일 마인츠대학의 입학허가까지 받아둔 상황에서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결국 그는 형제를 대신해 어머니를 부양하기로 하고 한국에 남아 대학원을 진학했다. 이후 한국전력공사를 거쳐 농협 조사부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며, 그와 경제학의 인연은 거의 끝난 듯 보였다.
1986년 어느 날이었다. 고향친구인 김태경 씨가 그를 호출했다. 당시 김태경 씨가 운영하던 출판사 ‘이론과 실천’은 그가 다니던 농협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들르던 터였다.
“갔더니 원고뭉치를 보따리에 싸서 주면서 집에 가서 열어보라는 말만 하더라고요. 그것이 바로 『자본론』 1권의 초벌 번역 원고였죠.”
다음날 김태경 씨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빵재비(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이유로 감방을 다녀온 사람을 이렇게 불렀다 한다) 6명이 『자본론』 1권을 번역했는데 내가 이 책을 출판해야겠으니 강 형(김태경 씨는 강신준 교수를 강 형이라 불렀다)이 원고를 좀 봐 달라’는 것이었다.
김태경 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강 교수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틈틈이 원고를 살폈다. 6명이 분량을 나눠 번역한 것이라 전체적으로 문장이 고르지 않았고 용어도 통일돼있지 않았다. 수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최종 원고가 완성됐다.
당시엔 문화공보부에서 납본을 받아야만 책을 출판, 판매할 수 있었다. 만일 검열 결과에서 판매금지를 당한다면 책이 폐기처분되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자 처벌 또한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납본을 하고 검열까지는 일주일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이들은 『자본론』이 판매금지 될 것을 미리 알고 일주일만 판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김태경 씨는 그를 철저히 보호해주겠다는 약속 하에 ‘김영민’이라는 가명으로 책을 출판했다. 그렇게 『자본론』 1권은 세상에 나왔다.
“책이 나오자마자 김태경 대표와 최광열 편집장은 곧바로 도피했습니다. 판매금지를 당하고 처벌받을 거란 사실을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책을 출판하는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꼭 내야 한다, 그랬죠.”
이제 법적인 문제가 남았다.
“검사가 기소하려면 자본론이 이적 표현물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책에 이적성이 드러난 부분을 찾아야 했죠. 들리는 바에 의하면 검사가 자본론을 6번 정도 읽었다고 하는데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검사는 자문해줄 전문가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검사의 편에 서서 증언해줄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결국 검사는 기소를 포기했고 이로써 『자본론』에 묶인 족쇄가 풀렸다.
『자본론』이 맺어준 동아대와의 인연
김태경 씨의 부탁으로 강 교수는 남은 2, 3권의 번역도 맡게 됐다. 마침 박사논문을 위해 회사를 휴직한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1990년까지 2권과 3권이 출판됐다.
농협의 복직을 기다리던 1991년 어느 날이었다. 평소 호형호제하던 박형준 현 우리 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동아대에서 경제학과 교수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는 박 교수의 손에 지원서를 들려 보냈고,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됐다. 물론 자본론 덕분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당시 우리 대학은 마르크스 경제학자를 찾고 있었다고 해요. 그러나 이를 전공한 학자는 우리나라에 많지 않았습니다. 금지학문이었기 때문에 책이나 논문 등 연구 실적이란 게 있을 수가 없었죠. 그러니 제가 『자본론』을 번역했던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 교수는 교단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돈 보다 중요한 게 있다
그와 얘기하는 내내 궁금했던 한 가지. 23년 전 그들은 왜 당연히 판매가 금지될 것을 알면서도,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본론』을 출판했던 것일까. 강 교수는 “때론 역사적 족쇄를 끊는 일이 내 인생을 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과거에는 경제적 이익보다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고요. 허나 요즘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미국식 승자독식의 원리가 팽배해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흐름과도 맞지 않습니다. 결코 가치 있는, 옳은 방향이 아니에요.”
강 교수는 매학기 첫 수업마다 학생들에게 경제학과를 선택한 이유와 자신의 강의를 신청한 이유를 쪽지에 쓰도록 한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수첩만한 크기의 종이 뭉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의식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기 위해 이 내용을 백분율로 환산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요즘 학생들의 생각은 어떨까. 70%가 넘는 학생들이 ‘재테크를 위해서 경제학을 공부한다’는 다소 씁쓸한 결과가 돌아왔다.
그는 말했다.
“대학은 지식만을 전달하는 곳이 아닙니다. 대학에서 이런 부분에 대해 일정한 교정을 해주지 않는다면 이들이 졸업 후 사회로 나가 소위 말하는 출세를 하면 할수록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여전히 살아있는 책 『자본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은 다시 『자본론』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마르크스와 『자본론』을 재조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이 출판된 지 150년이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1967년 영국의 자본주의와 2010년의 대한민국은 너무도 닮아있습니다. 쉬운 예로 용역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마땅히 쉴 곳이 주어지지 않아 화장실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한다는 보도가 최근 있었죠. 자본론에도 공장 노동자들이 머물 곳이 없어 복도에서 잠을 잔다는 얘기가 등장합니다. 『자본론』을 읽다보면 어쩜 자본주의는 지난 150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치곤 하죠.”
따라서 『자본론』은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흘러간 책이 아니라 1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이야기라는 의미다.
그러나 흔히 『자본론』을 ‘가장 안 읽히는 베스트셀러’라고 말한다. 그 가치와 중요성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데 반해 도통 주변에서 『자본론』 전권을 제대로 읽어낸 사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어려워 몇 장 읽다 포기했다는 사람이 다수다.
“그건 마르크스의 독특한 방식 때문에 그래요. 책의 앞부분에 모든 개념을 응축해놓기 때문에 앞부분만 읽고 어렵다고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많죠.”
강 교수는 1권 후반부터 읽기를 권유했다. 1권의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그도 어렵다면 12장 정도부터 읽는다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자본론』완전 완역의 의미
그렇다면 강신준 교수의 『자본론』은 어떤 가치를 가질까. 그의 『자본론』은 국내 최초의 완전 완역이라고 평가받는다. 완전 완역이란 첫째로 독일어 원전을 변역했다는 의미다.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자본론』은 이중번역을 거친 글이다. 독일어 원전을 번역한 영어판 혹은 러시아어판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다. 간단한 예로 영어판의 경우 원전과 편집구조가 다르며, 러시아어판의 경우 스탈린이 집권할 당시 번역된 것이라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이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아시아에서 독일어 원전을 자국어로 번역한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허나 일본조차 한 사람이 『자본론』 전권(총 3권)을 변역하지는 못했다. 한 사람이 『자본론』을 모두 번역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워낙 분량도 방대한데다가 이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깊은 경제학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강신준 교수는 『자본론』의 독일어 원전 모두를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경제학자가 되는 셈이다. 인터뷰 서두에 그는 말했다. “20년 넘게 지고 있던 짐을 이제야 ‘일부나마’ 내려놓은 기분”이라고. 그렇다. 아직 그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15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살아있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그의 연구도 계속 진행 중이다. <취재=구보은 대외협력처 홍보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