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와의 운명을 말하다

평생 무언가를 내 운명이라, 인연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평생을 찾아 헤매도 자신의 운명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국어국문학과 하치근 교수는 ‘국어는 내 운명’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2010년 8월 퇴직을 앞두고 찾은 그의 연구실은 책꽂이를 가득 채웠던 책들이 반쯤 비워진 채였다.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98점이 바꿔준 인생

그가 어떻게 국어를 시작했는지 궁금해져 앉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 교수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시키셨다고 한다. 다음날 점수를 발표했는데 그는 반에서 98점으로 1등을 했다. 점수를 발표하며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100점을 줄 터인데 왜 98점을 줬는지 아느냐. 너는 ‘충성’을 써야할 자리에 ‘효도’를 썼다.” 하 교수는 “인연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다”며 “당시 선생님의 말씀이 큰 동기가 되어 국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만약 그때 98점이 아닌 100점을 받았다면 그의 인생은 또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1년간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그는 자신이 음악, 체육, 미술 등에 소질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래선 학생들을 바르게 지도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초등학교를 그만뒀죠. 그리곤 중등학교 국어과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어요.”

나의 스승, 허웅 선생님

그의 책 마지막 페이지를 펴면 ‘국어를 빛낸 인물’ 아래 허웅 선생님의 소개가 쓰여 있다. 어떠한 사연이 있기에 그의 사진을 책에 담게 된 것일까. “고등학교 교사로 일할 때 학회에서 발표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엽서가 도착했어요. 허웅 선생님이 보내신 거였는데 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너는 대학에 가야한다. 대학 교수가 되어라.’ 이 말씀이 그에게 더 큰 꿈을 꾸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사를 마친 우리 대학,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하 교수를 부르는 호칭은 매우 다양하다. 교수이자 학자, 수필가, 이사… 이외에도 학교에서 다양한 보직을 맡았다. 14권의 책을 꾸준히 내오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학교 일에도 발 벗고 나서는 그. 하 교수는 “내 힘은 미약하지만 모교가 잘 되는 길이라면 보태고 싶다”며 “오히려 그것밖에 못했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14권의 책을 내기까지 어려움을 말해달라고 하자 “학자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짧게 답한다. 그의 강직함이 묻어났다.

‘한마’, 국어를 향한 외길인생

하 교수는 최근 두 권의 책을 동시에 발간해 화제가 된 바 있다. 한 권은 『우리말 파생형태론』(도서출판 경진)으로 지금까지 그가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하였으며, 『거울속의 흔적』(세종출판사)은 정년기념 산문집으로 그동안 하 교수가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했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하 교수의 호는 ‘한마’다. 이는 한마음의 줄임말로 늘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겠다는 그의 생활신조를 딴 것이다. 호를 들으며 나는 그의 삶과 이리도 잘 어울리는 호가 있을까 생각했다. 98점을 받은 초등학생이 초등학교 선생님, 중고등학교 선생님을 거쳐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늘 그의 곁에는 국어가 있었다.

하 교수는 현재 한글학회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퇴직 후에도 우리 대학과 끝없이 교류를 주고받을 예정이다. 그는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사명이자 의무”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한강이남 사학의 명문으로서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학교당국과 학생들 모두 열심히 뛰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짧게 밝혔다.

인터뷰 말미에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운명은 쉽사리 달아나버릴 뿐이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자에게만 운명은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결국 하 교수의 끝없는 노력이 국어를 그의 운명으로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