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외환위기 직후의 금모으기 운동은 신화였다. 국가부도 속에 351만 명이 참여해 227t, 21억3000만 달러의 금을 모아냈다. 그 자체가 위기 극복의 동력이었다. 한국인들이 자발적인 희생을 감내할 애국자들임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사·정이 힘을 합쳐 실업대란을 막은 ‘일자리 나누기’에 대해 당시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마땅한 영어 단어를 찾기 힘든 창의적 위기 극복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마음만 동하면 장롱 속의 금도 내놓고, 재산 손실도 감내하며 동료들 일자리를 위해 임금 삭감도 받아들인다. 이런 잠재적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이 위기에 대처하는 국정 책임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다. 위정자들은 국민에게 위기 극복의 주체가 되라고 호소하긴커녕 정부에 의존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사기를 끌어올리는 용감한 장수가 되기보다는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가 되려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도 정부가 살을 도려내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지원 받는 사람도 고마움을 알고 세금 내는 국민도 보람이 있다. 국가재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위안이라도 받는다. 그런데 현 정권은 국가재정이 건전하니 빚을 과감히 늘려도 된다는 기가 막힌 논리에 집착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재정이 건전한 이유는 전 정권들이 알뜰히 살림을 살아서이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장점이다. 한데 빚이 많은 나라들을 기준으로 빚을 막 늘려도 된다는 식이니 어떤 국민이 세금 낼 맛이 나고 정부 돈을 내 돈 같이 아끼려 하겠는가.

  위기 극복에 더 위험한 것은 국민을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행동들이다. 만일 총선에서 이긴 후 더 겸손한 자세로 국민에게 단합을 호소하고 야당의 손을 잡고 협치를 이끌었다면 더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의 힘으로 야당을 무시하고 국회직을 독식하면서 실패한 부동산 정책을 세금과 규제 덩어리로 땜질하는 법안을 밀어붙이는 데만 골몰했다. 나아가 정권 눈에 난 검사들을 쫓아내고, 방역에 정신없는 의사들의 화를 돋우는 정책을 눈치 없이 들고 나와 사단을 만들었다. 파업 와중에 느닷없이 의사들을 제치고 간호사들만 위무하는 어이없는 이간책을 쓰기도 한다. 그 결과는 정치적 양극화다. 현 정권 아래서 지지층과 반대층 사이의 간극과 적대감은 ‘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만큼이나 크게 벌어졌다.

  에이미 추아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가 최근 쓴 ‘정치적 부족주의’는 이 시대 분열의 정치가 가져온 비극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나뉘어 죽으라 하고 싸우는 일은 내전이나 엄혹한 독재 국가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하는 미국이나 한국도 해당한다. 한·미 양국의 대통령은 정치적 성향은 딴판이지만 정치담론이나 행동은 유사하다. 칼 슈미트가 말한 명제, 즉 정치는 지지자와 반대자를 나누는 일이고 지지자를 결집해 권력을 지키라는 명제에 충실하다.

  하지만 이는 불행하게도 민주공화국의 가치에는 반하는 일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은 분열과 적대의 정치를 견제와 균형의 제도화로 해소하고 공동체의 통합을 지향하자는 헌정질서다. 특히, 위기 때 통합의 정신이 빛을 발한다. 단합된 힘으로 위기를 넘어서면서 국민이 국가의 소중함을 느끼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과연 그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