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pg) | 홍순권
사학과 교수 | 전염병 창궐 역사 되풀이…인간의 오만이 위기 키워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당시 시민의 헌신과 믿음…
K방역에도 그 정신 필요
우연찮게 찾아낸 1907년 일본인이 제작한 부산항 옛 지도를 보니, 지금의 충무동 보수천 해안가에 전염병 전문 치료 병원인 피병원이 표시되어 있다. 피할 피(避)자의 이 피병원은 부산을 강제 개항한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서면서 세운 병원이었다. 19세기는 콜레라 등 전염병이 각국에서 창궐하였고, 국제무역항이었던 개항장을 중심으로 각종 전염병이 유행하던 때였으니 피병원은 나름 서양식 근대 의료시설의 본보기와도 같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서도 전염병 유행은 세계 각지에서 오래 지속되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기성세대에게는 매년 행사처럼 다가왔던 결핵 퇴치 기금 모금을 위한 크리스마 씰 강제 판매가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선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전염병은 분명코 근대 서구문명의 전파와 함께 본격적으로 세계화의 바람을 탄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인구가 밀집된 도시 생활이 보편화되고 교통수단이 급속히 발달한 현대 사회는 역설적으로 전염병 병원체 팬데믹의 최적 환경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다만, 현대의학 발달로 과거 공포의 대상이었던 콜레라 결핵 장티푸스 같은 수많은 전염병이 정복되는 과정에서 경계심이 약해진 인간의 안일한 대처가 오늘날 코로나19의 팬데믹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과거 전염병 치료 병원을 피병원이라 했듯이 전염병 예방의 기본은 피하는 것, 즉 거리두기이다. 현대의료 기술에 대한 인간의 과신과 오만으로 이 기본이 무시되어 오늘날 미국 유럽 등에서 최악의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유발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세계 각국이 코로나19로 대혼란을 겪는 동안 우리는 그래도 이 위기를 잘 버텨냈다. 방역 모범국으로서 위기에 강한 나라라는 칭송도 들리고, 그 덕분에 K팝에 이어 K방역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K방역이 성공적이었다는 데는 많은 나라 사람이 공감하면서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평자에 따라 간혹 부정적인 시선도 없지 않다. 특히 언필칭 선진국에서 방역에 실패하는 사례가 속출하자 이와 비교되는 한국 사례를 한국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는 이들도 나타났다. 프랑스의 모 유명 변호사는 한국은 비민주적인 감시국가이기 때문에 방역에 성공한 것이라며 한국은 사생활 침해로 개인의 자유가 무시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 외국의 어느 셀럽은 K방역 성공 이유를 권위에 순종하는 가부장적 유교문화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어느 경우이든 한국의 민주적 시민의식을 폄하하는 이러한 시선은 한국 현대사에 무지한 서구인의 오랜 편견인 오리엔탈리즘의 속성을 보여준다. 올해는 작년 부마민주항쟁 40주년에 이어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코로나19와 관련해, 40년 전 광주의 5월을 기억하면서 특히 떠오르는 것은 시민군이 공수부대의 학살 만행을 저지한 뒤 일시적으로 맞이한 해방 광주의 모습이다.
공수부대가 퇴각한 이튿날인 5월 22일 아침 일찍부터 광주 시민은 거리로 나섰다. 시민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난장판이 된 거리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말라붙은 핏자국을 물로 씻어내고, 불탄 차와 바리케이드로 썼던 전화박스, 대형 화분을 치웠다. 계엄군의 봉쇄로 광주는 외부와 통하는 통신·교통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광주에서는 매점매석과 같은 사재기는 없었다. 큰 도로 주변에서 주부들이 가마솥을 걸어놓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제공했고 슈퍼나 구멍가게에서도 빵 우유 드링크제 등을 아낌없이 무상으로 내놓았다.
부상자를 너나없이 간호했으며,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은 병원으로 달려가 헌혈했다. 아직 많은 총기가 시민의 손에 있었지만, 약탈이나 폭력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거나 ‘폭도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식의 당시 정부 선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5월 광주에서는 ‘믿음의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해방 광주에 대한 집단기억은 이후 1987년 6·10민주항쟁에서, 2016년 가을 시작된 ‘촛불혁명’에서 재현되었다. 해방 광주의 집단기억 속에 각인된 민주적 시민의식의 기본은 배려였다.
올해 40주년을 맞은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생활 속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온라인 등을 중심으로 내실 있게 준비되고 있고, 외부 행사는 조용히 치러질 예정이다. 그럼에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롭게 다가오는 올해 5월이다.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는 한국의 시민정신은 민주화운동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일찍부터 잉태되어 온 것이다. K방역이 예상치 못한 이태원 클럽발 감염 사태로 위기를 맞은 지금 해방 광주의 시민정신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배려가 없는 자유는 오히려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상기하면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