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신문/인문학 칼럼] 책연(冊緣)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2018-10-25 오전 10: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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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인문학 칼럼] 책연(冊緣)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책연,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먼저 책과 그 책을 만난 독자의 인연을 이르며, 나아가 책을 매개로 독자 간의 인연을 뜻한다. 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에서 소녀와 소년의 사랑이 싹트는 계기도 책연이며, 메리 앤 셰퍼의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건지섬에 사는 농부 ‘도시’와 런던에 사는 작가 ‘줄리엣’을 맺어준 것도 책연이다. 1998년 시애틀에서 ‘만약 시애틀 시민이 책 한 권을 같이 읽는다면’으로 시작한 움직임은 한 권의 책으로 시민 전체가 책연을 맺자는 발상이다. 훗날, 이 생각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독서운동으로 평가받는 ‘한 책, 한 도시’를 이끌었다.

  1980년대, 나는 입대를 앞두고 한 여인을 만났다. 요즘 말로 소개팅 자리였고, 서로 상대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다. 당시 음악다방이 유행이었는데, 나는 다방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상대는 알 두꺼운 안경을 낀 야윈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자리는 애써 자리를 주선해준 친구의 선의와 달리 파국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반전은 상대 여인이 이별의 예의를 다하고자, 자신이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를 꺼내며 시작되었다. 나도 그 책을 좋아했기에 나름의 독서 감상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훗날 아내가 된 그 여인은 내가 눈빛을 반짝이며 책 이야기를 할 때, 적당히 시간 메우다 일어서려던 그 자리에서 한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노라 고백했다. 내가 사랑하는 책을 사랑하는 당신이 책연이다.

  책은 인류 가장 오랜 미디어다. 매체(media)는 사람의 생각이나 사물을 전달하는 수단을 말하며, 기술의 발달로 인쇄 매체인 책 신문 잡지의 영향력이 이전만 못하지만, 책만큼 오랫동안 소통 수단으로 활용된 매체는 없었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에서 서기 400년경 두루마리 형태의 책들이 코덱스로 바뀌면서 책은 매체의 중심에 섰고, 구텐베르크의 발명품 이후 지금과 같은 코덱스 책은 제작 속도, 텍스트의 통일성, 값이 싸다는 이점 등으로 인류의 주요 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오늘날 매체로서의 책의 가치는 예전 같지 않으나, 책만큼 곡진하게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미디어는 앞으로도 발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매체로서의 책에 관심을 두는 이라면, 메리 앤 셰퍼의 서간체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과 책연이 닿았으면 한다. 건지(Guernsey)는 영국 최남단 채널제도에 있는 섬 이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영토인 채널제도는 5년 동안 독일 강점하에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채널제도를 대표하는 섬이 건지이고, 이 섬은 프랑스와 가까운 영국령이었기에 1851년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썼던 망명지이기도 하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를 배경으로 한다. 런던에 사는 작가 줄리엣은 건지섬에 사는 농부 도시 애덤스가 보낸 편지를 받는다. 도시는 헌책으로 구한 수필가 찰스 램의 책이 원래 줄리엣의 소유였음을 알고, 그녀에게 찰스 램의 다른 책도 구할 수 있는지 정중하게 물었다. 도시는 편지에서 독일군 점령하에서도 자신이 찰스 램 덕분에 웃을 수 있었고, 위로받았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독서 모임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건지섬을 점령한 독일군은 섬에서 기르는 가축들을 군대 식량으로 몰수했고, 사람들은 감자를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어느 날 몰래 숨겨놓은 돼지로 이웃이 모여 바비큐 파티를 열었는데, 밀주를 마시며 늦게까지 놀다 통금에 걸렸다. 독일군의 총구를 마주하고 수용소로 끌려갈 절체절명의 순간, 엘리자베스는 북클럽에서 토론을 하다 늦었다고 독일군 장교에게 둘러댄다. 엉겁결에 둘러댄 독서 모임 이름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었고, 이들은 독일군의 감시하에 계획에 없던 독서 모임을 꾸려간다.

  건지에는 서점이 없고, 이들은 애초 독서와 거리가 멀었다. 훗날 북클럽 회원인 존 부커가 줄리엣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오직 한 권의 책 ‘세네카의 편지’를 되풀이해서 읽고 있으며, 세네카와 독서 모임이 술로 지새던 비참한 삶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다고 말한다. 그 모임의 힘으로 독일군 점령기를 버틸 수 있었고, 세네카의 글이 나중에 닥쳤던 어려운 시기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소설은 찰스 램의 책을 매개로 줄리엣과 도시의 사랑이 이루어지며 끝난다. 책이라는 매체를 매개로 하여, 건지섬 북클럽 회원들은 평소 대화도 거의 없던 이웃과 책연을 맺고 엄혹한 독일 나치 치하를 견뎌낸 것이다. 사는 게 팍팍할수록 우리에게 닥친 고난의 순간에 삶을 지탱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우는 힘이 책에 있음을 상기했으면 한다. 어떤 책과 연을 맺고, 그 책을 매개로 어떤 인연을 만날지, 곁에 잠든 아내를 보며 책연의 소중함을 떠올린다.

 

[2018.10.25.(목) 국제신문 오피니언 27면 / 기사 전문 보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