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성언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 혹시 이런 노래 들어보셨나요. "기쁘다, 구제품 나왔네! 줄 서서 받아라." 제 또래들이 국민학교 때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곡조에 맞추어 부른 것이니 연식이 꽤 된 올드 송이지요. 아 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컴퓨터로 원고 쓰면서 마음먹고 '국민학교'라 치면 자동맞춤법기능이란 놈이 친절하게도 꼭 '초등학교'라고 정정해 주는데 진짜 미칠 지경입니다. 수고스러운데 관두시라고 해도 막무가내네요. 제가 눈비 맞아가며 6년 공부 마친 게 소학교도 아닌 국민학교지 무슨 초등학굡니까. 말이란 건 시대 따라 바뀌는 법이니 지금 분들 맘에 차지 않더라도 당자에게 익숙하고 정이 들었으면 그냥 쓰게 해도 괜찮은 거 아닙니까. 일제 잔재라 욕해도 그리 써야 맘이 푸근하니 우짭니까. 가령 퇴근 때 "어이, 이자까야 가서 사케 이찌 꼽푸하자! 간조오 많이 나오면 와리깡하고"라고 외쳤는데, 그걸 두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라고 몰아붙이면 참 입맛 쓰겠지요. 그럼 "헤이, 와인바 가서 하우스와인 원샷하고 하이 카운트면 더치페이하자"고 하면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그저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순리니, 올여름 찜통 한반도에서 푹푹 삶기고 있는 배달 족속들이 단군 할아버지더러 하필 이 땅에 터 잡으실 게 뭐냐고 원망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습니까. 뭐 다 운명이지요.
꼰대 영감이 또 하나 마나 한 옛 얘기 꺼낸다 하실지 모르지만, 우리 전쟁둥이들은 사실 전 세계로부터 답지했던 구호물품, 즉 구제품(救濟品)의 세례를 만끽한 복덩이였습니다. 결국 오목판 신세로 전락했지만 "미국 어린이가 보낸 선물"이라고 적혔던 모눈종이 공책, 석기시대 뗀석기같이 딱딱한 우유 덩이와 누런 먼지 폴폴 나는 강냉이가루, 악수하는 두 손이 그려진 포대 밀가루, 서전과 가나다 선교회의 옷가지가 기억납니다. 서전이 스웨덴, 가나다가 캐나다인 것은 나중에 알았지요. 전쟁 막 치른 세계 최빈국 백성들로서야 정말 구세주가 보내신 생명줄이었으니 베토벤이 아니더라도 기쁨에 넘친 환희의 송가가 터져 나오지 않고 어찌 배겼겠습니까.
'구제품 나왔네, 줄 서서 받아라'
전쟁 후의 그 줄 서기, 어찌 잊으랴
맛집이라도 기다리는 건 사양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공급과 수요의 엄청난 불균형으로 야기될 배분의 문제였겠지요. 기아에 허덕여 살기로 희뜩이는 눈들이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 시대에 줄 서기가 한민족에게 당초부터 결핍된 최고의 도덕으로 칭송된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천상의 양식인 만나는 눈처럼 쏟아져 이스라엘 백성을 먹였고 예수님은 밀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렸다지만 그런 무망한 기적보다는 줄 서서 구제품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리니, 아아! 그 줄 서기를 어찌 잊으리오. 동네 하나뿐인 수도꼭지에 밤새 보초 선 물동이 행렬, 동회 앞에 쌀자루 들고 몸뻬 아지매들 틈에 줄 섰던 조그만 우리 셋째 누나, 똥차 앞에서 똥 푸는 아저씨의 부르심만 고대하던 슬픈 줄 서기, 화폐개혁 때 은행 앞 밤샘하는 긴 줄에 쪼그린 울 어매. 추석날 서울역 광장에서 순사가 휘젓는 장대를 피해 이리저리 휘둘리던 긴 줄들. 그 와중에도 정의랍시고 절규하던 "새치기 맙시다!" 그놈의 줄 생각하면 눈물까지 줄줄. 그땐 줄을 나라비라 했지요.
요즘 맛집이란 게 유행입디다. TV에 나왔거니 유명인이 들렀거니 하며 사람을 꾀는데 그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긴 줄이 또한 장관이더군요. 슬그머니 갔다가 혼비백산 도망치곤 했습니다만, 어릴 때 그 괴롭던 나라비의 기억이 본능적으로 뇌의 운동신경에 퇴각을 명령했겠지요. 오후청 팔진미에다 곰 발바닥 스테이크와 원숭이 골 푸딩을 얹어 준다 해도 줄 서긴 정말 사양하고 싶습니다. 높이 달린 포도송이를 보고 "저건 분명 시어 빠졌을 거야" 하고 군침을 삼키며 돌아섰던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제 소굴로 돌아가 라면이나 끓여 먹는 게 상책일 겁니다. 다 운명이지요, 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