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 가슴 뛰는 생의 한순간, 강렬한 감정인 푼크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상실의 아픔은 크지만 소중했던 순간의 기억 사진첩을 정리하다 어머니의 옛날 사진을 보았다. 여름 바다, 늦둥이 막내를 튜브에 태우고 햇살을 받으며 눈부시게 웃는 사진 속 어머니는 허리가 굽고, 다리가 휜 팔순의 노인이 아니었다. 파란 바다와 검은 튜브, 어머니의 자색 수영복,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환한 웃음 때문인지 나는 사진을 보다 눈이 시려 눈물이 났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했던 푼크툼(punctum)이었다. 처음, 이 용어는 사진을 보며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보는 이의 경험에 비추어 사진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지만, 이제는 사진뿐 아니라 인생의 어떤 강렬한 장면을 회상할 때도 차용한다. 푼크툼과 대비되는 것이 ‘스투디움(studium)’이다. 스투디움은 공통된 심상이나 보편적 정서이다. 스투디움이 객관적이라면 푼크툼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인생을 사진에 비유한다면 평범한 일상이 스투디움이고 가슴을 뛰게 하는 생의 한순간, 한 장면이 푼크툼이다. 이 용어에 얼마나 강렬한 의미를 담고 싶었기에 롤랑 바르트는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punctionem’에서 표현을 가져왔을까. 푼크툼은 작가의 의도가 개입할 수 없는, 철저한 수용 미학의 영역이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감성이며 우연히 쏜 살처럼 날아와 박힌다. 푼크툼은 나를 상처 입히고, 자극을 주는 우연성이다. 애초에 자극 없이 설레고 요동치는 가슴은 없으니. 사진 속 그해 여름, 대학 입시를 앞두고 모두 막바지 정리에 여념이 없을 때, 나는 학교 자율학습 시간에 어떤 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책에서 읽었다. 학업에 큰 관심이 없어 닥치는 대로 책 읽기를 즐겼던 시절, 그 한 구절이 날아와 아프게 박혔다. 그날 자율학습을 빼먹고 무작정 강으로 갔다. 저물 무렵, 강가에서 바지를 걷고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강물은 찼고 노을과 심장은 붉었다. 훗날 이곳 강가를 다시 찾아 강물에 발을 담근다 해도, 그 강물은 이미 흘러갔음을, 지금의 이 강물이 아님을 생각하며 눈물이 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오늘을 추모하며 밤새 아바(ABBA)의 노래를 들었다. 10년 전, 영화관에서 ‘맘마미아!’를 보았고, 다시 정확히 10년이 흐른 올해 여름, 그 영화의 후속편을 본 것은 아바 때문이었다. 맘마미아는 아바의 노래를 사랑하고, 인생의 푼크툼을 여전히 기억하는 자들을 위한 영화이다. 관객은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세대를 아울렀고, 옆자리 모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손을 잡고 있었다. 영화는 세상을 떠난 엄마 ‘도나’의 젊은 날과 딸 ‘소피’의 현재를 교차하며 흘러간다. 뮤지컬 영화답게 쏟아지는 아바의 노래는 카세트테이프로 매일 아바의 노래를 듣던 그해 여름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눈부시게 싱그러운 젊은 날의 도나가 그리스 섬에 있는 낡은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이 시작됨을 직감한 듯 ‘I have a dream’을 부르는 장면에서, 나는 자발없이 눈물이 났다. 푼크툼은 개인의 경험에서 오는 강한 인상이고, 한순간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다. 그것이 사진이거나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필연적으로 상처를 동반한다. 그때의 장소와 사건과 사람이 지금은 없기 때문이다. 노년에 떠돌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공자는 어느 날, 제자들과 시냇가에 앉아서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탄식했다. “모든 흘러가는 것이 저와 같구나! 밤낮을 멈추지 않는구나.” 논어 자한 편의 이 구절을 한자성어 ‘불사주야(不舍晝夜)’의 뜻처럼 밤낮없이 배움에 힘써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노년의 인간 공자에 주목한다면 시냇물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보고, 인생의 흘러감도 이와 같아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님을 탄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강물이 흐르듯 우리는 모두 밤낮없이 세월 따라 흘러가고, 그 누구도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듯 인생은 돌이킬 수 없다. 사진 속 어머니도, 영화 맘마미아의 거칠 것 없는 젊은 시절의 도나도, 강물에 발을 담그던 내 소년 시절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음을 알지만, 문득 그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가슴 저리게 아려 오는 것이 인생이다. 이 자명한 사실로 나는 죽음에 이를 때, 내 인생이 편년체로 기억되길 원하지 않는다. 이력서 속의 기록처럼 몇 연도에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직장에 근무했는지, 그렇게 무덤덤하게 기록되는 인생이 되고 싶지 않다. 내 가슴을 뜨겁게 뛰게 했던 생의 장면들, 첫딸이 태어난 날 불안하고 초조하던 젊은 아빠가 분만실 창밖으로 본 희붐한 새벽 풍경처럼,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으로 기억되길 소망한다. 푼크툼은 상실했기에 더욱 소중한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푼크툼을 만날 수 있다면, 인생은 덧없이 흘러도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