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강은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 손주가 셋이라고 하니 이미 많이 들어본 듯한 말이 빈정대듯 들려온다. “사위가 돈을 잘 버나 보죠.” 또는 “따님이 참 애국자시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손주가 보고 싶어 딸 집으로 달려간다. 식탁에 앉아 딸과 차를 마신다. “이게 얼마 만이냐. 너와 한가하게 차를 다 마시고 있다니”, “네, 엄마. 아직 막내는 ‘어린이집’이지만 이따 데리러 가면 되고, 다른 애들은 저희끼리 잘 크고 있어요. 돈이 문제이긴 하지만 어떻게 되겠죠. 지금은 저만의 휴식시간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셋 중 한 아이는 늘 젖을 물리고 있던 딸은 오랜만에 생기 있는 얼굴로 차를 마신다. “엄마. 사실 그동안 전쟁이었어요. 낳는 건 문제가 아니에요. 기르는 거예요.”
식탁에 어린이 잡지 두어 권이 널브러져 있다. 나는 그중 한 권을 집어 아무 페이지나 편다. “요즘 꼬마들은 어떤 생각을 하나 보자” 하고 짐짓 어른다운 목소리를 내며. 그런데 아뿔싸. 아무렇게나 펴든 그 페이지엔 퀴즈가 나와 있었다. 나는 퀴즈를 들여다보았다. “다음 단어의 뜻을 맞춰 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 봐요.” 굵은 글씨체로 소확행(小確幸),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욜로(YOLO·You Only Live Once) 등이 쓰여 있었다. 나는 얼른 딸에게 묻는다. “워라밸이 뭐니. 소확행은 어디선가 들었어, 그런데 욜로는 정말 모르겠구나”라고 하자, 딸은 “애들이 오면 물어보세요, 요즘 애들 말은 나도 잘 몰라요”라고 한다.
다행히 그 페이지의 하단에 답이 쓰여 있어 얼른 답부터 읽어본다. 소확행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에서 나온 것으로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먹는 것, 서랍 안에 돌돌 말아 넣은 속옷이 잔뜩 들어 있는 것,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등이라고. 즉 남이 보기엔 별 볼 일 없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 속의 사소한, 그러나 도달하기가 확실한 행복감이라고.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 욜로는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이 모두가 일상 속 작은 행복의 추구, 세계적인 생활방식, 이 시대 젊은이들의 트렌드라고.
순간 나는 좀 멍해졌다. 아이들이 언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어른들이 저출산 대책입네, 50만원을 줍네, 결혼율의 증가입네 하는 동안 아이들은 이러한 답을 끌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답의 핵심은 일보다 현재의 삶을 또는 휴식을 즐기겠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어른들은 이러한 부류의 생각을 오해하지 말아야 해요. 큰 꿈을 가지고 노력해 봤지만 안 되니까 이러한 철없는 듯한 말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기성의 벽은 뚫을 수 없으니까. 금수저는 금수저이고 한번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이니까”라고 딸이 말한다. 그러니까 워라밸이니 소확행이니 하는 말은 젊은이의 철없는 말장난이 아니라 그 밑바닥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려는 반어적인 그들 나름대로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그게 잘사는 이웃나라의 성공한 작가의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러니까 저출산이라는 문제의 답은 두 가지밖에 없어. 하나는 남보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가져야 한다거나 남 위에 서려고 하는 가치관인 기성세대의 가치사고 전환을 가져오는 방법. 그런데 이것은 너무 시간이 걸리니 아이를 기르는 문제를 도와주는 것. 이 둘밖에 없다고 생각해.”
맞벌이하는 딸의 아이 둘을 키우느라고 디스크에 걸린 동생의 말이 멀리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우선 기업을 교육하는 거야. 다음 세대가 없으면 자신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기업이 나서야 해. 육아휴직 뒤에도 돌아와 이전과 똑같은 의자에서 이전과 똑같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젊은이들은 겁 없이 출산하지 않을까” 하면서 ‘고달픈 친정어머니’인 동생은 웃는다.
아무튼 아파트 넓이를 결코 생각하지 않는 가치사고의 전환 아래,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기성세대가 너무 넓지 않은 알맞은 크기의 의자에 앉을 후세를 키우겠다는 의지와 비전을 보인다면 저출산 문제는, 이 나라의 미래는 어느 정도 구원되지 않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