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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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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기간에는 선수들의 승전보와 아쉽게 놓친 메달, 그리고 선수들을 뒷바라지한 가족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방송을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요즘 TV나 신문지상에서는 여검사의 성추행 피해 고백 이후 현직 부장검사가 구속되는가 하면, 연극계의 대부였던 유명 연출가가 십수 년 동안 자신의 극단 소속 여성단원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고발에 잇따르는 폭로 등으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간호사계에서도 '태움'이라는,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끔직한 관행이 오랫동안 자리 잡아 결국 안타까운 목숨을 잃게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자탄과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요즘 읽고 있는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이라는 소설의 제목이 우리의 현 상황을 묘사해 주는 것 같아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조셉 콘래드는 이 소설을 통해 19세기 후반 유럽의 한 지식인이 아프리카의 정글에 가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서서히 잔혹해져 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잘 그려주고 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말로라는 선장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과 닮아 흠칫 놀라곤 한다. '암흑'과 같은 현 시대의 '심장'에는 도대체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그 '핵심'에는 어두움의 본질에 대한 우리들의 미몽(unawakened)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미몽의 뿌리는 급격한 산업화, 정보화의 숲에서 자라난 지나친 경쟁의식과 핵분열 같은 자기상실에 다다르고 있는 건 아닐까.
잇따르는 성추행 피해 고백
우리 사회 고질적 치부 드러나
책임 회피와 암묵적 공모는
공동체 몰락과 개인 파멸 초래
"부끄러운 줄 알라"는 절규 듣고
욕망의 어두움을 걷어 내야
공동체를 잃어 버리고, 가족과 헤어진 인간 군상들이 밀림 같은 도시를 방황하고 있으며, '자신의 더러운 욕망'으로 타인을 노예화하는 자칭 문명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고 변명과 책임 회피에 몰두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암묵적인 공모에 가담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당하는 참혹함은 외면된 채 익명의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탈의 체제가 강고해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 속에 새로운 21세기의 정신적 제국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른다. 콘래드는 콩고를 무대로 활동한 상아교역상 커츠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 우리에게 '무서워라'라고 외치고 있다. 무섭다. 두렵다. 우리 공동체의 몰락이, 개인의 파멸이 끔찍하도록 소름 끼친다. 그러나 그러한 공포는 새로운 탄생을 위한 전주곡이 되어야지, 파멸의 장송곡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해 일본과 한국에서 개봉되어 수많은 관객을 동원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었다. 혜성의 충돌이라는 긴박한 재난의 다가옴을 알리는 미츠하의 '여길 떠나라'는 외침에 대해, 이장의 마을 방송은 '거기 그대로 있으라'고 반박한다. 마치 세월호 선내의 마지막 방송처럼 우리는 순진하게도 누가 우릴 구원해 주리라 기대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길 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해결책이 아니다. 무너져 가는 기둥과 들이치는 흉흉한 파도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더 이상 그걸 용인할 수 없다고 외치며 과감히 변혁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며칠 전 미국 플로리다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사고는 미국 여느 도시에서 일어난 참사와 유사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사건이 다른 사건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련의 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피해 현장에서 살아온 학생들이 정치인들과 기성세대를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Shame on you)"는 절규를 쏟아 내며 단지 애도의 눈물 속에 파묻히지 않고 거리로, 방송으로, 워싱턴으로 행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몽에서 깨어났다. 이제 '예전에 나도(Me too)'에서, '너와 함께(With you)'를 넘어 '다음엔 나도(Me next)'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줄 알자. 잘못한 것을 피해자의 심정으로 참회하자. 그리고 지금은 내가 아닐 수 있으나, 다음엔 내가 저지를 수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암흑의 핵심'을 깨뜨리자. 시간이 많지 않다. 미츠하와 타키처럼 빛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어스름한 황혼의 짧은 찰나에 우린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잠시 동안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