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신문/인문학칼럼] 아우라, 왕의 오믈렛과 군대 라면 -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2017-11-16 오후 1: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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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인문학칼럼] 아우라, 왕의 오믈렛과 군대 라면
-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저물어가는 가을,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길을 걸으며 가수 윤도현의 노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흥얼거린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라는 구절에서 자발없이 코끝이 찡해져 노래를 잇지 못하고,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는 문태준의 시구를 떠올리며 걸음을 멈춘다. 그때 참새처럼 재잘대며 지나가는 중학생들이 서로를 툭툭 치며 주고받는 말을 듣는다. 의기소침한 표정, 작은 키에 몸피마저 여윈 친구의 어깨를 감싸며 함께 걷던 친구가 격려의 말을 건넨다. “인마! 너는 그래도 너만의 아우라가 있잖아.”

  아우라! 이 용어를 종교적 제의에서 세속으로 불러낸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다. 중학생이 벤야민을 알기는 어려웠을 터, 이제 이 용어는 출처인 벤야민의 에세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아우라를 획득하게 되었다.

  벤야민의 문장과 진술은 언제나 시적이다. 그는 아우라를 ‘먼 산에서 건듯 불어온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나 아렌트도 벤야민을 두고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벤야민의 아우라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왕의 오믈렛’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에 한 왕이 살았다. 어느 해, 왕은 외세의 침략으로 전쟁을 하다 쫓기어 결국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절망하던 왕은 기적처럼 작은 오두막을 찾아 그곳에서 노파가 만들어준 오믈렛을 먹을 수 있었다. 왕은 따뜻한 오믈렛 덕분에 힘이 났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샘솟아 올랐다. 이윽고 외세를 물리친 왕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오믈렛이 먹고 싶어 온 나라를 뒤졌지만, 숲속 오두막 노파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나이가 든 왕은 예전의 오믈렛을 한 번만 더 맛볼 수 있길 소원했다. 하루는 궁정 요리사를 불러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면 사위로 삼아 후계자로 봉할 것이나,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사형에 처할 것이라 엄명을 내렸다. 그러자 요리사는 왕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했다. “폐하! 그렇다면 사형 집행관을 당장 불러주십시오. 저는 천하의 진미를 만들 수 있는 요리법을 알고 있습니다만, 폐하께서 드셨던 그 오믈렛의 맛을 똑같이 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제가 그 당시의 재료를 모두 준비하겠습니까? 전쟁의 위기, 쫓기는 자의 절박함, 암울한 미래, 오두막 부엌의 따뜻한 온기, 반겨주는 노파의 온정. 이 모든 아우라는 제가 도저히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왕은 묵묵히 듣고는 요리사에게 선물을 가득 챙겨주어 보냈다.

  군 생활 중, 겨울에 밖에서 떨면서 근무 서고 돌아와 끓여 먹던 라면 맛, 그 맛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어느 직장인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왕의 오믈렛을 떠올렸다. 다시 군대 가면 된다, 회사에서 새벽까지 야근하고 먹으면 된다 등 유머 섞인 주위의 조언이 많았지만, 왕이 그러했듯, 그도 다시는 그 라면 맛을 볼 수 없을 테다. 아우라는 두 번 경험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주체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얻는 특별한 주관적 경험이자 교감이다. 예술에 있어 아우라를 지닌 작품의 수용은 그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고 침잠함으로써 주체와 대상이 통일되고 교감하는 순간을 통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그것은 벤야민의 표현대로 ‘공간과 시간의 특별한 직물’이며 반복될 수 없다. 그러기에 모든 아우라는 아름답고 슬프다.

  아우라는 대상 자체가 지니는 고유한 느낌이나 분위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느낌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 진품을 본다고 누구나 아우라를 느끼지 않으며, 어릴 때 눈물 펑펑 쏟으며 읽었던 ‘플랜더스의 개’의 넬로처럼 성당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본다 하여 누구나 아우라에 감동하는 것도 아니다.

  발터 벤야민이 살았던 시대와 달리, 보드리야르가 강조했듯 실재와 원본조차 사라지는 시뮬라크르의 시대인 오늘날, 원본과 복제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그런데도 벤야민의 아우라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의 아우라는 개념이 아니라 시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공간과 시간의 특별한 직물이며, 먼 산에서 건듯 불어온 바람 같은 것.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거리,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며 흥얼거렸던 노래, 그 노래를 부르며 울컥했던 순간, 떠올렸던 시인의 시구가 어우러져 아우라가 된다.

  자신의 경험에 오감(五感)을 맡기는 자, 그리하여 순간을 사는 자,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자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우라다. 두 번 다시 닿을 수 없어 슬프나, 그러기에 더 아름다운 순간, 그 감각의 기억들이 아우라다. 왕은 오믈렛을, 전역한 직장인은 라면을 다시는 맛볼 수 없으나, 생생한 감각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설명하며 이렇게 진술한다. ‘멀다, 그러나 가깝다’.

 

[2017.11.16.(목) 국제신문 오피니언 31면 / 기사 전문 보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