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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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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깊어 들국화가 산마루를 옅은 보랏빛으로 애잔하게 수놓을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서두가 제법 로맨틱하게 시작되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람은 외로이 살아가는 '산장의 여인'도,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도 아닌, 좌자(左慈)란 옛 중국 술사다.
"조조의 군사가 아무리 기를 쓰고 말을 달려도 좌자 선생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오나라로 통하는 언덕길에서 선생은 뒤를 돌아보며 한번 싱긋이 웃고는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언덕에는 들국화 한 송이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선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고(先考)께서 사주신 <중국동화집>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 끝부분이 너무도 좋아 육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외우고 있다. 최근 명나라 때 발간된 그림판 백과 전서인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좌자의 이름을 다시 접해 가슴이 저렸다.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 좌자
조조를 웃음거리로 만든 추남
그의 들국화는 무상의 징표
전설에 따르면, 이 광사(狂士)는 천하의 술꾼에다 추남으로 조선 실학자 이덕무도 <청장관전서>에서 역대 추물의 대표로 그를 끌어대었다. <삼재도회>에선 애꾸눈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부러 옆얼굴만 그려놓았는데 짱구 대머리 영감이 마술을 부려 만든 학을 치어다보며 벌쭉벌쭉 웃고 있다. 명망을 익히 들은 조조의 초대를 받고는 온갖 기행과 방술로 간웅의 속을 뒤집어 놓았으니, 말하자면 육십갑자(六十甲子)에 통달했던 그가 악당의 속셈을 꿰뚫어 보곤 요즘 말로 육갑을 떨어 그 간담을 서늘케 했던 모양이다.
마침내 후환을 아예 없애려고 작정한 조조가 미주(美酒)로 선생을 곯아떨어지게 만든 다음 도술을 부려 도주할까 저어해 온몸을 누에고치처럼 꽁꽁 묶고는 감옥에 처넣었다. 새벽에 간수가 들여다보니 선생이 어느새 포승을 다 풀고는 태연히 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는데, 보는 사이에 감옥에도 뜰에도 심지어 조조의 침실에도 수천 명 애꾸가 나타나 예의 밉상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어슬렁거렸다. 불같이 노한 조조가 마구 칼을 휘둘렀는데 거꾸러진 시체는 모조리 짚단이나 낙엽 덤불이었다. 뒤에 선생이 적국 오나라로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해 군사를 보내 죽이려 했으나 결국 그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좌자 같은 인물은 유비와 제갈량을 동정하는 후대의 일반적 정서에 따라 조조를 폄하하기 위해 이런저런 흥밋거리 이야기를 덧붙여 만들어낸 캐릭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폭군이 웃음거리로 전락할 때 사람들은 응징의 쾌감을 느끼게 마련이니, 청에 항복한 후 도술 영웅 박씨 부인을 만들어내 전쟁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려 한 조선 유가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실존이나 행적의 사실 여부, 혹은 역사적 평가와는 관계없이,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집에 묘사된 멋진 냉소주의자 애꾸 선생, 그리고 그가 표표히 사라져 간 언덕에 피어난 들국화라는 구도는 지금까지도 나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오묘한 마술을 부리고 있다. 좌자가 도술을 빙자한 사기꾼이거나 혹은 재능을 숨긴 채 세상을 차버린 일사(逸士)이든, 조조가 간특한 술수로 중원을 망친 간웅이거나 혹은 도도한 문장과 탁월한 치재(治才)로 일세를 건진 영웅이든, 어떤 평가라도 나에겐 별 중요하지 않다. 이자가 이 말 하면, 저자가 저 말 하다가 종국엔 <동물농장>의 결론처럼 어느 놈이 돼지인지 어느 놈이 인간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 소위 역사이기 때문이다.
영화 '시민 케인'의 마지막 장면에는 권력과 명성의 허무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인공이 어릴 때 타고 놀던 스케이트가 반전(反轉)의 소도구로 등장하는데, 그처럼 좌자의 들국화 역시 무상(無常)과 색시공(色是空)의 아름다운 징표라 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도 다들 저 애꾸 선생처럼 좋은 가을날 들국화 핀 언덕을 넘어 옛 인연들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을 오! 나라로 갈 것이니,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생각들 속에서 부질없이 마음만 느껍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