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언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처음 접했을 때 그렇게도 아름답고 가슴을 찡 울리던 시가 국어 시간을 거치면 영 재미가 없어지다가 월말고사를 치르고 나면 아예 보기도 싫어지던 경험을. 존경하는 선생님들께서는 교과서의 모든 시를 나라 잃은 슬픔과 조국 독립의 의지로 연결시키는 데다가 그 긴 것을 무조건 외우라 하니 시란 놈이 지긋지긋할 수밖에. 그래서 윤동주도 싫고 서정주는 더 싫고 한용운은 미웠던 게 아닐까. 　

   문학작품을 해석할 때 매사를 작가의 일생과 경험,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나 환경 같은 요소와 결부시켜 설명하고자 한 재미없는 사람들은 19세기 프랑스의 비평가들이었다. 그러다가 작품을 아예 모든 외적 조건과 단절시킨 채 잉크로 인쇄된 글자 그 자체를 응시하면서 왜 그것이 아름다운가를 탐구한 청개구리들이 나왔는데 그들을 신비평가라 부른다. 신비평가들이 대학에서 소설을 처음 공부하는 새내기들을 위해 지은 책이 바로 <언더스탠딩 픽션>이다. 대학 신입생 때, 말로만 듣던 책을 보고 감격에 겨워 하숙비 반을 주고 원서를 샀다가 짧은 영어 실력에 앞 몇 페이지만 읽고 한숨과 함께 책장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는데, 얼마 전에 누가 훔쳐가자 속이 다 시원했다. 아마 영화 '쥬만지'처럼 그 도둑도 밤새 끙끙대는 불행을 겪으리. 　

   마누라 무서운 건 세계 공통 현상
   미국 초기 소설 '립 밴 윙클' 눈길
   임과의 다툼 없는 게 차라리 지옥 　

   그 책의 두 번째 챕터에 예화로 수록된 작품이 '립 밴 윙클'로,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소설의 할아비인 매월당 김시습쯤 되는 미국 초기 작가 워싱턴 어빙이 지은 픽션이다. 말하자면 구전되는 설화가 어떻게 현대문학의 정화로 대접받는 소설로 발전해 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삽입한 것으로 정말 별것 아닌 그렇고 그런 시시한 이야기인데도 역사가 워낙 짧은 그네들은 그걸 금지옥엽처럼 떠받들면서 미국독립 당시의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추킨다. 　

   미국이 영국 식민지였을 때, 지금의 뉴욕 근처 산골에 사는 사람 좋은 촌무지렁이 립 밴 윙클은 지독한 공처가였다. 아침부터 퍼붓는 마누라의 딱따구리 공습에 견디다 못해 나팔총을 둘러메고 멍멍이와 함께 뒷산에 몸을 피했다가, 거기서 이상한 옛 복장을 한 네덜란드인들을 만난다. 그들의 볼링놀이를 구경하다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20년이 흘러 있었다. 마을에 내려갔더니 미국은 독립국이 되어 있었고 마누라도 이미 세상을 떠난지라 천국 같은 고향에서 원로 대접을 받으며 그야말로 게으르게 태평을 누리면서 "잘 묵고 잘 살았더라"는 이바구다. 　

   학자들은 악독한 마누라는 착취를 일삼던 대영제국을 의미하며 해방된 주인공은 독립을 이룬 미국을 상징한다고 의미부여를 하지만, 기실 무서운 마누라 vs 사람 좋은 공처가 남편 같은 캐릭터나 한잠 자는 사이에 몇십 년이 흘렀다는 무상(無常) 플롯은 중국의 <태평광기>나 한국의 <골계전> 같은 책에 아주 흔하게 등장하는 만민 공통의 화소다. 그만큼 마누라는 무서운 존재이며 그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남자들의 가냘픈 열망 또한 세계적으로 공통된 모양이다.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퇴직한 우리 립 밴 윙클들은 입만 열면, 양지바른 조그만 시골집에서 텃밭을 가꾸다가 밤하늘 별을 보며 막걸리 한잔하는 것이 꿈이라고 소박한 소망을 펼치는데, 그 가상의 무대에 부인이 임석하셔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가타하면 골치가 아플 것이고, 부타하면 후환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일 년을 못 견디고 다시 그 압제의 품 안으로 자발적인 귀환을 단행하는 이들을 숱하게 봐 온지라, 어떡하든지 동혈 해로를 다짐한 사랑하는 평생동지를 은둔의 장으로 모셔다가 자연이 주는 멋과 자미(滋味)를 한껏 누리시도록 노력한다면 20년 동안이나 잠을 자야 하는 고역은 없을 것이다. 임과의 티격태격이 없는 천국은 지옥보다 못하다는 속담도 있고, 만해 스님도 "남들은 자유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라고 '님의 침묵'에서 읊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