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명아 한국어문학과 교수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다른 세계 보는 것

   전혀 다른 혹은 이질적 현실을

   살게 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인 것　

   1930년대 잡지를 보면 경성 거리에서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여성들이 너무나 많아져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녀들은 잡지나 신문의 쪼가리 기사로 등장하지만, 당대에도 후일에도 그녀들의 말과 삶을 복원할 방법은 없다. 사회 문제로 분류돼 그녀들의 삶과 목소리는 마치 인화할 방법을 알 수 없는 ‘네거티브 필름’처럼 우리에게 전해진다. 페미니즘은 이처럼 말과 기록을 갖지 못한 존재들의 말과 삶을 만나기 위해 들리지 않는 말을 듣고, 흔적을 읽는 독특한 방법론을 모색하면서 고유의 이론과 사상을 만들어왔다.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에게는 천국인 세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옥이라는, 서로 다른 현실 감각과 그 정치성에 대한 사유는 페미니즘 사상의 가장 바탕이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현실을 감각할 수 없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현실을 다르게 감각하게 만들고, 그 결과 현실 감각은 분열되고 복잡화된다.　

   한국 사회에서 오랜 세월 페미니스트를 “정신 나간 여자” 정도로 치부한 건 이런 현실 감각의 차이화 과정, 분리 과정의 효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정신의 문제도, 생물학적 성의 문제도 아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다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고, 이런 세계에 대한 경험은 각성과 같은 인식론적인 것만은 아니고 전혀 다른 혹은 이질적 현실을 살게 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인 것이다.　

   이렇게 다른 현실을 살게 되고,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의 고통과 분열과 희열을 너무나 명확하게 기록하고 사유한 사상의 거처는 박완서 문학이기도 하다. 박완서 문학은 종종 ‘오빠의 죽음에 들려 있는’ 것으로 논의되거나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박완서 문학이 페미니즘 사상의 거처라는 점은 바로 이 ‘들려 있음’과도 관련이 깊다. 박완서 문학은 생존 경쟁에 미쳐 달리는 ‘성장의 세계’ 속에서 학살의 현실을 함께 사는, 그런 현실 감각의 복잡화와 그것을 살아낸 존재에 대한 사유의 거처다. 현실 감각이 복잡화된 주체에 대해 지금까지는 그저 병리학적 해석(트라우마나 우울증)이나 비현실적인 초월의 감각 정도로만 해석될 뿐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나 김숨의 『한 명』 등 폭력의 경험이 촉발하는 이질적 현실 감각은 ‘유령’이라는 오래된 재현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폭력의 경험이 존재를 변용시키는 과정과 닮아 있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폭력의 경험이 각인된 신체는 폭력의 원천이 된 세계에 포섭되거나 그 세계를 승인하지 않기 위해 변치 않는 세계와 불화한다. 그 불화가 신체를 변용시키고, 변용된 신체는 다른 세계, 이질적 세계를 살게 된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 분열되고 복잡화된 세계 경험을 통해,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열망하게 된다. 폭력의 경험이 신체를 변용시키는 과정이 페미니즘 공부길, 혹은 페미니즘 사상이 발현하는 바로 거기다. 폭력의 원천이 되는 세계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거부를 통해 저항의 신체를 만들고 그렇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정치와 사상이 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몫’이라는 생물학적 분류학이나, 세계와 여성이라는 전체와 부문으로 나뉘어 할당된다는 식의 생각이야말로 ‘민주화’와 ‘87년 체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거치면서도 청산하지 못한 낡은 분류법이다.　

   페미니즘을 여성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페미니즘을 부문 운동으로 치부하는 낡은 논리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런 낡은 논리와 분류학이 페미니즘을 사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페미니즘을 새로운 세상을 발명하는 혁명적 사상이 아니라, 여성 문제를 해결하는 분과 학문에 가두었다. 부문 운동을 논하던 시대에서 이미 한 세대를 건너뛰었음에도 새로움과 세대적 차이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이 여성의 몫을 고수하며 세계가 아닌, 성차의 분류학에 골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이런 페미니즘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새로운 세대 페미니즘만의 문제는 아니다. 페미니즘 역시 다른 사상과 마찬가지로 이론과 실천에 다양한 갈등과 차이가 존재한다. 다만 그 차이가 페미니즘을 사상으로써 더욱 깊게 만들기 위해서는 분류학을 반복하는데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