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신문/세상읽기]5월 단상 - 전성욱 한국어문학과 교수 2017-05-24 오전 11:55:17
   대외협력과 / 조회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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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세상읽기]5월 단상
- 전성욱 한국어문학과 교수

 

 
   
 

전성욱
한국어문학과 교수

   어느 누군가는 5월을 일컬어 민망한 달이라고 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일들을 그달에 몰아서 해내야만 하는 어떤 겸연쩍음을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얼마 전에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몇몇 학생이 다가와 편지를 건넸다. 연구실로 돌아가 그 수줍은 마음들을 흐뭇하게 느끼다가, 주고받는다는 것의 간단치 않은 의미를 생각해보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른바 김영란법이 적용되고 난 후에 처음 맞는 스승의날이었다. 그동안 받아오는데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그 법은 너무 매정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를 스스로 통치하지 못하고 일상의 곳곳에서 법의 지배로 통치당해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고받는 증여의 문화에는 그 훈훈한 겉모습과는 달리 지배와 종속의 냉엄한 권력 관계가 내재해 있다. 세상의 모든 위계서열의 관계는 그 수수의 과정에 앙금처럼 어떤 공리적인 목적을 남긴다. 바라는 것 없이 내어주고 부담을 느끼지 않고 받을 수 있는 순수한 증여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례는 감사에 대한 갚음이라는 점에서 그 수수의 맥락은 철저하게 계산적이다.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것이 일종의 권력이라면, 그 권력에 바쳐진 선물에는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얼마간의 기대가 잠복해 있을 것이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줄 수 있는 순수한 무상의 증여가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이라면, 우리는 그 이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까다로운 법의 지배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메이데이, 5월은 국제노동절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이번 노동절에는 안타까운 비보가 있었다. 고단한 노동 중에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삼성중공업이라는 대기업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고였으나, 그 희생자들은 다단계 하도급으로 일하는 외주업체의 노동자들이었고, 결국 그것은 위험의 외주화와 책임의 외주화라는 것이 분명했다. 아비를 잃은 자식에게 어린이날이란 무엇이며,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어버이날은 무엇이었을까. 노동절을 앞둔 4월 28일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에서 분리했다. 세계적으로도 최장의 노동시간을 일하고, 산별노조의 교섭권을 부인당하고, 귀족노조라는 말로 노동자의 생존을 건 투쟁을 비열하게 폄훼하는 나라,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든다는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처우는 과연 세계 몇 위인가.  

  
5월은 또한 대선의 달이기도 하였는데, 한 유력 정당의 후보자는 강성귀족 노조와 싸워 이겼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탄압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것은 공당의 대표를 맡았고, 한 지자체의 장을 역임했던 자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천박한 것이었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사람이 대권을 야망하는 나라, 그런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내가 안락한 단잠에 빠져 있는 순간에도 고공에 올라 농성을 하고 한뎃잠으로 버티며 외치는 이들이 있다. 몰리고 몰려 아찔한 첨탑에까지 올라 외치는 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5월에 해야 할 가장 절실한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  

  
1980년 5월 18일,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5월의 봄은 남달랐다. 몇 년째 국무총리가 대신했던 자리에는 탄핵 이후에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9년째 거부되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이 이루어졌다. 지난 몇 해의 시간 동안 5월의 광주는 일베들에게 조롱당하고 극우들에게 왜곡되었으며, 정권으로부터 무시되었다. 5월 광주는 이념의 대결로 분분한 정쟁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미제 사건이며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역사의 통각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번 5·18기념식에서는 '나라다운 나라'를 기대해볼 만한 시적인 순간이 있었다. 5월의 그날이 자신의 생일이자 아버지의 망일이라는 한 여인의 눈물 섞인 추도사가 끝나고 그 자리를 퇴장할 때,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대통령이 일어나 그녀에게로 걸어가서 아버지처럼 안아주었다. 그것은 계획된 의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장 순순한 공감의 표현이었다. 그녀를 자기의 자리로 불러온 것이 아니라, 그가 걸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증여의 계산이 아닌 순수한 공감으로 가능한 미래를 예감하는 순간이었다. 5월의 봄날은 또다시 가고, 속절없이 떠나는 것들을 붙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의 5월이 다르게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기쁨을 느낀다.

 

[2017.5.24.(수) 국제신문 본지 30면 / 기사 전문 보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