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언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노무(老) 형! 봄비 맞은 하얀 벚꽃이 소복이 쌓인 걸 보니 봄도 이젠 절정인 것 같습니다. 올여름은 제발 작년처럼 덥지 않아야 할 텐데 벌써 걱정이 태산입니다. 전대미문의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도 세상 염려보다는 제 몸 걱정이 앞서니 나이가 들긴 든 모양입니다. 이기적인 보신주의자 꼰대 할배라 욕을 해도 어쩌겠습니까. 백남준 화백은 만년에 '예술은 사기다'라고 평생 해 온 자신의 일을 냉소했다지만,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평생 온갖 말 사기를 쳐 온지라, 이젠 세상 하직할 때까지라도 자신에게만은 정직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우리 대학 시절 문학계가 참여 순수 논쟁으로 온통 편이 갈리어 시끌벅적했던 일을. 국문과에 입학했더니 선배가 고무신에 막소주를 부어 먹이면서 이렇게 묻습디다. "넌 참여냐, 순수냐?" 바로 그 병아리 참여파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한 시인이 바로 김수영이었지요. 지금도 외우지만,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고 쓴 그 시인 말입니다. 대입 참고서에는 아예 저항시인이라 못 박았더군요. 휘트먼의 풀잎과는 또 다른 서정의 세계를 보여 주었던 그분의 작품 중 첫 줄에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시가 있었지요. 기름 덩어리만 둥둥 뜬 갈비탕을 내놓는 돼지 같은 주인 여자에게만 욕을 퍼부을 뿐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 정정당당하게 부정한 권력에 맞서지 못하는 자신의 옹졸함을 스스로 풍자한 내용이라고 기억합니다. 질식할 것 같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재갈 물린 지식인의 이유 있는 항변이었겠지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노하는가?
   '큰일'보다 '작은 일'에 신경 곤두서
   최소한의 품위 지키려는 노력 있어야 　

   그런데 노무 형. 요즘 들어 '큰일'에는 아예 관심이 꺼지는 대신, 부쩍 '작은 일'에만 신경이 곤두서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기야 떨어진 쭈그렁밤송이 같은 자가 천하대세와 국가의 명운을 논하는 것도 꼴불견이겠지만, 굳이 변명을 첨언하자면 나라가 이 꼬라지가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나라의 지도적 인사들이 하나같이 국위에 걸맞은 품격 있는 언행을 하지 못했던 데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야 전통시장 가서 갓난아기를 안고 거짓 함박웃음을 웃든지, 채소장수 할매하고 마음에도 없는 포옹을 하든지 내 알 바는 아닙니다만, 최소한의 품격의 모범은 보여 주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공자 말씀에 따르면 민초들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풀잎 같은 존재라 그걸 그대로 배우게 마련이니까요. 　

   얼마 전 남한산성 갔다가 행락객 한 떼가 남의 무덤에 스틱을 꽂아 두고 술을 퍼마시기에 그래도 입이 있다고 한마디 했더니 대뜸 이러더군요. "아따, 그 영감쟁이 말도 많네. 묻힌 놈이 니 애비가?" 억새로 유명한 가을 승학산에서 배낭 가득 도토리를 주워 오는 아지매더러 "산돼지하고 다람쥐는 뭐 묵고 살끼요?" 했더니 돌아온 말씀은 "할배요, 니 갈 길이나 가소. 미쳤나, 남 간섭하게"라고 무안을 주더군요. 친구들 술자리에서 이야기랍시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한탄을 했더니, 처방을 알려 주더군요. 스마트폰 음악 틀고서 산을 누비는 자에게는 최근 출시된 효도 테이프의 흘러간 뽕짝 볼륨을 최대로 높여 맞불을 놓고, 억새 꺾고 도토리 훑는 자에게는 부러 "어이, 김 주임, 지금 내려가는 아줌마, 벌금 오만 원 부과하시오"라고 전화 거는 체하면 혼비백산 다 던지고 도망칠 거라고요. 　

   아아, 노무 형! 형의 아호처럼 이 아름다운 봄날 하늘 높이 떠오르는 종달새 보며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오, 종달새'라도 듣고 싶습니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이제 바다에 밀려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 속에서도 밀다원으로 모여들어 클래식 LP를 틀던 우리 선배들이 생각나네요. 아마 그것이 그들로서는 최소한의 인간 품위를 지키려는 마지막 조그만 노력이 아니었을까요. 품위를 위한 작은 노력 없이 어떻게 큰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국가나 세계도 결국 '나'라는 소우주에서는 하찮은 작은 것에 불과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