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일보/기고]영혼이 있는 전문가를 기다리며 - 곽은희 기초교양대학 교수 2017-03-24 오전 10: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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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기고]영혼이 있는 전문가를 기다리며
- 곽은희 기초교양대학 교수

 

 
   
 


곽은희
기초교양대학 교수

  헝가리 문예사상가 루카치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고, 가야 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가야 할 길을 훤히 비추어주는 별빛 대신 우리 생을 이끌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가치들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이러한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삶에 골몰한 나머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현대적 삶의 구조와 대면하게 된다.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이들 중 다수가 학자 출신 관료, 교수, 의사, 재벌 총수 등 전문가 집단이라는 사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보다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특히 청와대 행정관이 국가기밀문서를 유출한 것이 상관의 지시에 복종한 결과라는 사실은 '비리에 대한 공모'가 구조적인 문제임을 말해준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비리에 대한 공모가 합리성의 구조와 연관되어 있음을 명쾌한 언어로 풀어낸다.  

  
현대적 관료 체제는 복잡하고 거대한 일들을 합리적·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전체를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분업화하고, 각각의 과정들을 전문화한다. 모든 행위의 책임이 상관의 명령권으로 이전되는 까닭에 개별 행위자인 '나'의 의무는 상급 기관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국한된다. 막스 베버의 말을 빌리면 이 과정은 공무원의 명예로 표현된다. "공무원의 명예는 상급 기관의 명령을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성실히 수행하는 능력에 있다. 이것은 명령이 그릇된 것처럼 보이거나 상급 기관이 (공무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고집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명예를 통해 개별 행위자의 도덕적 책임은 상관에 복종하는 규율로 대체된다. 조직 내부의 규율은 개인적 양심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현대 관료제는 개별 행위자의 도덕 감정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바우만의 분석에서 현대적 관료제가 제공하는 도덕적 수면제의 핵심은 불가시성과 거리 두기이다. 분업화된 구조 속에서 일하고 있는 개인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전체 구조 속에서 조망할 수 없다. 상호작용의 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과관계 역시 개인 차원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불가시성'이란 바로 이런 상태를 지칭한다. '거리 두기'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결과가 최종적으로 야기하게 될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불가시성과 거리 두기로 말미암아 개별 행위자의 관심은 오로지 눈앞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데로 집중된다. 도덕(성)은 결국 효율적이고 성실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계명으로 대체된다.  

  
문제는 효율적이고 성실한 전문가가 되는 과정에서 개인적 양심과 도덕적 책임이 점점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비리에 대한 공모가 현대 관료제의 구조적인 맹점에 있다고 해서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리에 대한 구조적인 공모를 저지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을 위한 효율인가?', '무엇을 위한 성실인가?'를 되묻는 흔들림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 흔들림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구조에 맞서는 풀뿌리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같은 성찰은 하루하루 생존이 절박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뜬금없이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전국에서 주말마다 일어났던 촛불시위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되묻는 성찰의 시간을 더는 미룰 수 없음을 직접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다.

 

[2017.3.24.(금) 부산일보 본지 37면 / 기사 전문 보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