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언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이언(已焉)형. 달포 전 당신의 호 하나 지어 보내라는 형의 전화를 받고 나서, 오십 년도 넘은 아련하고 예쁜 추억에 잠시 잠겼습니다. 삼선개헌반대의 열풍으로 고등학교마저 후유증을 앓던 무렵인가요. 단합을 명분 삼아 반별 장기자랑대회가 열렸는데, 각 반의 내로라하는 한량들이 총출동해 그 무렵엔 귀했던 전기기타를 두드리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사랑을 배반한 딜라일라를 열창했지요. 선생님들이 어이가 없어 "저놈들 봐라?"는 표정으로 바깥만 바라보고 계시던 차에, 무대로 우르르 올라온 3학년 7반 전원이 한 사람의 선창으로 불렀던 노래, 바로 그 노래! 능청맞고 구성진 음색의 가수 해리 벨라폰테가 부른 '데이 오'였습니다. 　

   한문에서 허사라 불리는 낱말
   세상의 신산과 세월의 무상 표현
   돈과 권력의 허무한 이치 드러내 　

   마틴 루서 킹과 함께 인권운동을 주도했던 그가 바나나를 실어 나르는 자메이카 뱃사람들의 애환을 리메이크한 일명 '바나나 보트 송'이 가을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구덕산 솔숲을 뚫고 먼 하늘로 경이롭게 울려 퍼지던 모습을 저는 기억합니다. 이 나라 노동요처럼 여러 사람의 후렴구 합창에 앞서 힘차게 먼 카리브 해의 민요 칼립소의 앞소리를 메기던 친구가 누군지 그때는 몰랐는데 얼마 전에야 그가 바로 형이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암울했던 그 시절, 아마 형은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는 쇠도 녹인다는 <삼국유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아 우리의 희망과 의지를 선창했던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형. 형의 귀한 촉탁을 받자와 아우가 외람되게 이미 이(已), 어조사 언(焉)으로 아호를 올린 것을 의아히 여기시겠지요. 호란 게 애당초 당사자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와 다른 이들의 경애(敬愛)를 반영하는 것일진대, 두 단어 다 별다른 뜻이 없는 허사(虛辭)로 충당한 게 될 법인가 하는 이도 분명 계실 겁니다. 그러나 형! 제게 한문 경전 읽는 법을 가르쳐 주신 백아(白牙)선생께서는 만년에 허사를 써서 이현(以玄)이라 자호하고는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그저 빙그레 웃음만 보이셨는데, 겨우 줄글의 구두점을 떼게 된 지금에 와서야 그 깊은 내연(內淵)이 어렴풋이 짐작됩니다. 　

   우리네 말과 글에서 명사가 으뜸가는 킹카이자 퀸카라면, 동사는 부림을 받는 복심이요, 형용사와 부사는 그 앞에서 알랑방귀를 뀌는 군소배들인데, 어조사 즉 한문 문법에서 허사라 불리는 일군의 낱말들은 그저 높은 사람 밑이나 닦아 주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 어디 성곽이 돌로만 됩니까. 찹쌀과 짚 섞은 진흙으로 틈새를 이어야 만년 왕국을 지키는 보루가 되지요. 또 천재나 고관대작이 저 혼자 잘났습니까. 못난 쪼다들이 떼거지로 있어야만 인정을 받지요. 장자(莊子)가 말했듯 빈 그릇, 즉 허명(虛皿)이 있어야 실재(實在)가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이치 아니겠습니까. 　

   도연명이 '귀거래사'의 말미에서 "이 내 삶에 가고 쉬는 것[行休]이 있음을 알겠도다" 하고는 이어 "이의호(已矣乎)인저!"라고 허사를 세 개나 연호했던 것도 바로 그런 뜻이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갔다는 뜻의 이(已)와 아무 의미도 없이 문장의 끝에 외롭게 자리한 언(焉)은 세상의 신산(辛酸)과 세월의 무상(無常)을 겪을 만큼 겪고 "어허,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우리만이 소유할 수 있는 낱말이라는 생각입니다. 　

   한시의 달인이자 고스톱으로 강호 무림의 무릎을 꿇리신 스승 청파(靑坡)선생께서는 평소 무해무득(無害無得)을 늘 강조하시고 실행하셨지요. 고도리나 오광을 잡고도 짐짓 쭉정이로 3점만 내어 후학들이 거액을 토하는 아픔을 겪지 않게 하시는 그 놀라운 배려는 기실 돈도 권력도 다 허무하다는 진리의 상징으로서의 허사의 이치를 깨달은 이의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이언 형. 굳이 첨언하자면, 호 턱은 상어 두투 한 접시와 소주 1병이면 족하오니 두루 명념해 주소서. 일없고 심심한 자들의 모임인 일심회의 여러 형들과 어울려 고산병 걱정 없는 해발 50m 용두산을 정복한 후 자갈치 좌판에 둘러앉아 뒤풀이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