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언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여조(如照)형. 　

   일본 규슈 올레를 걷습니다. 참 대단한 풍광이네요. 우리 제주 올레를 스승 삼아 만든지라 길 곳곳에 낯익은 제주조랑말 간세가 표지로 반겨 주는 데다, 세상에! 어찌 그리도 친절한지 거짓말 안 보태고 십 미터마다 색색 리본을 몽골 서낭당의 오방색 깃발 '어워'처럼 줄줄이 달아 놓아 부러 산중도사가 되고 싶어도 길을 잃을 핑계가 없습디다. 　

   규슈 올레길에서 만난 노래
  부모 세대의 짠한 추억 떠올려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멍에가…　

   유황연기 오르는 고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다(飯田) 고원을 보며, 펄펄 끓는 마그마 위에 둥둥 떠 있는 불쌍한 나라라는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되레 복 받은 땅이라는 망발이 입에 맴돌았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일본인은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 즉 겉치레와 속맘이 판연 달라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민족이라고 야죽대지만, 뭐 제가 왜놈 앞잡이가 되어 매국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 겸손과 남 배려는 알아줄 만하더군요. 　

   좁은 산길 걷노라면 앞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몰려오는 무리는 어김없이 중국 사람이고 울긋불긋 값비싼 등산복에 길이 미어져라 일렬횡대로 전진해 오는 분들은 간고쿠진인데, 니혼진들은 일렬종대로 멈춰 서서 오름길을 양보하며 저마다 '곤니치와'를 연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한국인의 금기를 깨고 남의 민족을 치키다가 아내로부터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사실인 걸 어찌하겠습니까. 　

   규슈 올레길 중 오쿠분고(奧豊後) 코스는 제법 험한 산길로, 종점 가까이에서 오카성(岡城)을 에돕니다. 뜻밖에 거기서 귀 익은 가락을 들었는데, 어릴 적 선고(先考)께서 약주 한잔 드시면 처연한 목청으로 부르시고 선비(先비)께서 나직이 따라 부르시던 바로 그 노래로, "고조노 쓰기"라는 일어 가사만 기억납니다. 충청도 제천 박달재 가면 하루 종일 확성기로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던 우리 님아"라는 금봉이 전설을 들을 수 있듯, 오카성에서도 지치지도 않고 그 노래 '황성(荒城)의 달'을 테너와 소프라노로 번갈아 틀고 있더군요. 　

   쓰보이 사카에의 전후(戰後) 소설 '스물네 개의 눈동자'를 기억하시는지요. 세토 내해의 작은 어촌 분교에 부임한 처녀 선생과 열두 명 제자의 즐거운 시간들,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광풍 속에서 실명한 남자 제자와 기생이 된 여자 제자가 옛 선생님과 봄날 마련한 작은 술자리, 거기서 같이 부르던 슬픈 노래. "봄날 정자에서 꽃놀이 잔치, 돌아가는 술잔엔 그늘이 지네." 청춘에 요절한 작곡가 다키렌 다로(瀧廉太郞)가 1901년 오카성의 폐허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던 바로 그 노래를 빌려온 거지요.　

   폐허가 된 고성과 지는 꽃, 그리고 하얀 달이 어울려 빚어내는 슬픔. 두보의 저 유명한 회고시 '옥화궁'과 우리 여류시인 황진이의 '이별'에서 그려낸 영상과 어찌 그리도 흡사한지요. 마치 세 시인이 어울린 합창을 듣는 듯했습니다. 소멸의 미학이란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어릴 때 부모님이 일본 노래 부르면 참 듣기 싫었습니다. 침략자 일본이 미우니 그 노래도 미웠겠지요. 그런데 이제 나이 들어 '황성의 달'을 들으니 일본어도 모르면서 가슴이 짠해지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 부모님 세대처럼 우리도 우리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멍에를 지고 있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형은 가끔 포스터가 작곡한 '스와니 강' 같은 미국민요를 우리가 중학교 때 왜 그렇게 많이 배워야 했던가 툴툴대곤 했지요. 미국 연수 시절 술자리에서 그 나라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올드 블랙 조'를 불렀더니 정작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리 머지않은 훗날 우리가 세상과의 인연을 거두어야 할 시간에 '매기의 추억'을 부르면 임종한답시고 둘러선 자식들은 눈살을 찌푸릴까요. 저들 역시 자기 시대의 아들들임을 깨닫는 날 저들만의 노래를 나직이 부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