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pg) | 권명아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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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익… 삐이익” 붐비는 지하철 안에 신경을 긁어내리는 신호음이 울린다. 안전 예보인지 위험 예고인지 알 수 없는 신호음에 사람들 사이로 미묘한 동요가 퍼져나간다.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진 않아도 불안과 공포 사이로 모두 몸이 기울어진다. 남녘에는 태풍과 폭우와 지진이 반복된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위잉 울어대는 바람소리가, 발밑의 미세한 진동이 모두 위험과 죽음을 실어 나르는 신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곳의 사람들은 비로소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강도를 달리하며 발밑의 세계를 뒤흔든 이 ‘파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파동 이후 사람들이 하나의 물방울, 잡을 수 없는 바람결에도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진 경험은 재난에 대한 ‘리스크 감각’도 강화했지만 리스크 감각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다. 이와 달리 지금까지 단단하게 여겼던 삶의 토대가 붕괴하고 있다는 감각은 ‘모두’를 사로잡았다. 물론 9·12 지진으로 인해 형성된 불안감이 단지 ‘헬 영남’의 자업자득이라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위험은 오로지 ‘너희들’의 몫이다. 그러나 지진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 위험은 ‘모두’의 것이 되고야 만다. 아니 지진의 높아지는 파동을 원전 위험이 ‘포퓰리즘’이냐 ‘경제발전’이냐 따위의 의견 대립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우주’의 경고로 읽어야 한다. 하나의 물방울에서, 잡을 수 없는 바람결에서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감각하는 사람들은 단지 신경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 이런 우주의 경고를 비로소 수신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현대 정동 이론가들이 자주 참조하는 고전 철학자 가브리엘 타르드는 이처럼 “세계와의 감응 속에서 ‘명확한 모습을 갖지 않는 무언가’가 마음에 새겨지는” 혼들 사이의 미묘한 감응과 변용 과정이야말로 사회라는 집합체의 상호간섭과 변화의 방향을 규명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지점이라고 논한 바 있다.(이토 마모루, <정동의 힘>)
한국 사회는 생명을 위협하는 근원적 위험에 대해 공통감각이 형성되는 것을 강박적이고 폭력적으로 ‘근절’해왔다. 특히 자산 손실과 경제 불안이라는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은 생명에 대한 위협을 공통의 감각이 아닌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과 갈등의 문제로 강제적으로 전도시켰다. 증오 정치와 혐오 발화는 공통감각이 형성되는 흐름을 깨트리고 기존의 지배적 힘으로 사회체를 되돌리곤 했다.
물, 바람, 땅과 쌀, 빛과 공기와 같이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것들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만물은 요동치기 마련이다. 이 요동은 사람과 동식물 같은 유기체들만이 아니라, 땅과 바위와 같은 무기물에도 미친다. 그러나 전자파와 전 지구적 자본의 네트워크로 뒤덮인 이 삶에서 모든 파동은 자본과 국가에 장악된다. 우주의 모든 파동을 자본과 통치의 대상으로 포획하려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죽음의 정치이다. 제주도로 향한 아이들이 죽음에 도달하는 세계, 밥쌀 수입을 금지하라고 상여 메고, ‘삶을 달라’며 상징 제사에 나선 이에게 진짜 죽음을 되돌려주는 세계, 죽음의 판(활성단층) 위에 또다른 죽음의 기계(원전)를 올려놓는 세계. 이 세계는 생명의 신호를 죽음의 파동으로 포획하는 세계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우리가 쌀 한 톨에서 피 냄새를, 한 줄기 바람에서 죽음의 위험 신호를 감지하게 되었다는 건 생명 신호를 유지하기 위한 우주적 싸움, 즉 ‘신의 싸움’이 이미 내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쌀 한 톨에서 우주를 본다는 건 이런 의미이다. 쌀 한 톨을 지키다 죽음을 맞은 사람, 백남기. 그의 삶과 죽음이야말로 지금, 여기에 내려앉은 신의 싸움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