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pg) |
강신준
경제학과 교수
|
민주노총에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까?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영원한 소수로 밀려난 미국, 일본의 노동운동과 위기에서 운동의 전망을 확보한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의 사례가 바로 그 대조적인 교훈을 전해준다. “운동의 현재에 매몰되어 운동의 미래를 버리는 것”―우리 노동운동이 빠져 있는 기회주의의 함정을 경고한 120년 전 엥겔스의 말이다.
지난 8월31일 사퇴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9월8일 사퇴의사를 철회하였다. 민주노총 최초의 직선제 위원장으로 각오와 책임감이 각별했겠지만 이미 동력을 잃은 조직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불통의 벽에 갇힌 현 정부를 상대하기도 모두 힘들었을 것이고 그나마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으니 그 착잡한 감회를 어디에 비길 수 있겠나 싶다. 참으로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일은 한위원장의 사퇴나 사퇴 번복으로도 우리 노동진영의 어려운 상황이 개선될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민주노총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조직이다. 하지만 위원장의 수감과 사퇴로 대변되는 현 상황은 민주노총이 사실상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소수조직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렁에 빠졌을 때 곧장 헤어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 더욱 깊이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법이다. 우리 노동진영은 현재의 상황에 분노하고 절망하기보다는 냉정하게 원인을 돌아보고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단서는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찾는 데에 있다. 그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은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자신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우리는 어제의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바로 변증법의 원리이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민주노총은 전노협에서 시작하여 열매를 맺은 조직이다. 그런데 이들 두 조직은 모두 출범 선언문에서 산별노조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노동운동이 자본주의라는 사회제도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교섭을 통해서만 자신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는 과학적 인식의 발로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그동안 자신의 이런 역사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사회적 교섭의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지 못한 것이다.
사회적 교섭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노동조직이 산별노조여야 하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교섭을 강제하는 장치이다. 외국의 경우 이런 장치는 법률(독일, 네덜란드)이나 사회적 협약(스웨덴, 덴마크)으로 마련되어 있다. 민주노총은 이들 둘 모두를 수행하지 않았다. 산별노조 건설은 교섭력이 분산된 “무늬”에 그쳤고, 사회적 교섭 장치는 노사정위원회 탈퇴 이후 다른 장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짧은 집행부 임기를 빌미삼아 근시안적인 기업별 교섭에만 매몰된 결과였다. 현재 민주노총의 위기는 사실 이처럼 자신의 역사를 등한시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개편으로 모든 노동문제는 사회적 의제로 바뀌었고 기업단위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졌다. 교섭과제와 교섭단위의 간극이 드러나면서 민주노총은 사실상 아무런 대응수단도 갖지 못한 식물조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민주노총에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까?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교섭을 이루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의 기회가 함께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조선산업의 구조조정이 산별교섭의 강력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구조조정에는 사회적 고용안전망 외에는 달리 답이 없기 때문이다. 조직 내부의 동력을 사회적 교섭에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내년도 대선에 뚜렷한 선두주자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조합원만 70만명이 넘고 각종 노동 의제에 대한 노하우가 충분히 쌓여 있는 조직이다. 조직을 선거 대응체계로 정비하고 의제를 적극 주도한다면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 사회적 교섭 장치를 조건으로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단숨에 눈부신 성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산별교섭 외에 다른 출구가 없고 역사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첫걸음에서 시작된다. 우리 노동운동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역사를 외면하고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더 가혹한 역사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영원한 소수로 밀려난 미국, 일본의 노동운동과 위기에서 운동의 전망을 확보한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의 사례가 바로 그 대조적인 교훈을 전해준다. “운동의 현재에 매몰되어 운동의 미래를 버리는 것”―우리 노동운동이 빠져 있는 기회주의의 함정을 경고한 120년 전 엥겔스의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