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pg) | 함정임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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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에 가리라, 마음먹은 지가 몇 해째였다. 간절곶에 가자, 문청들과 약속한 지도 몇 달째였다. 지난주 토요일, 그 마음들을 모아 간절곶으로 향했다. 등대 가까이, 해변에 자리 잡고 앉아 요즘 읽은 한국소설들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근래에 발표된 단편소설들이었다. 해운대에서 간절곶까지 35㎞ 남짓, 자동차로 40분 정도 거리였다. 오래 마음에 품었던 것에 비해 너무 가까워서 놀랐다.
일광(日光), 임랑(林浪), 월내(月內)…. 간절곶으로 가는 동안 마주치는 지명들은 해와 달, 그리고 바다와 관련이 깊었다. 해안선을 따라 부산진에서 해운대를 거쳐 울산, 경주에 이르는 동해남부선 열차가 운행되고 있는데, 가끔 무궁화 열차를 타고 경주로 가다가 창밖으로 이 아름다운 이름들을 스치고 지나갈 때면, 그리운 곳의 이름을 불러보듯 가만히 읊조리곤 했다.
바다와 관계된 그리움이라면, ‘서(西)로 멀리 기차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다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오영수 <갯마을>)의 주인공 해순이의 마음속 간절함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되새겨졌다. 바로 소설 속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내가 지나가고 있는 일광을 무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나고 자란 갯마을을 스물셋 청상과부가 되어 떠난 해순에게는 그리움이 사무쳐 보이는 것마다 미역으로 보이고, 가는 곳마다 바다로 보일 정도였다.
서정적인 장면 묘사로 시소설로 불리는 오영수의 <갯마을>(1953)은 바다가 가진 강한 생명력과 갯마을 사람들의 원시적인 토속성이 동해 바닷가 특유의 장소성을 통해 발현된 것인데, 시정(詩情) 넘치는 소설 속 정경은 이제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광 전후, 간절곶에 이르는 길은 민자 고속도로와 고가도로가 거침없이 놓였고, 몇몇 운치 있던 역들은 새로운 역사(驛舍)가 건립되어 이전했고, 초특급호텔과 명품 쇼핑몰과 저택들과 카페들이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월성원자력발전소와 관련 시설이 대규모로 자리 잡고 있었다.
간절곶이란 ‘원하고 기리는 절실한 마음(懇切)’이 아닌,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갔다 돌아오던 어부들의 눈에 곶의 형상이 ‘긴 간짓대처럼 보였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을 등대에 이르러 알았다. 간절곶에는 왜 가려고 한 것일까. 어떤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보고자 애썼던 것일까. 일광, 임랑, 월내…. 도로표지판에 새겨진 아름다운 지명들을 지나면서도 모종의 피로감을 느꼈다. 곳곳에서 맥을 끊고, 파헤치며 공사 중인 현장을 목도하면서 사나워진 마음결을 다스리느라 힘이 들었나 보다.
등대를 저만치 두고 완만한 언덕을 내려갔다.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에는 정오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해변에는 거뭇한 조약돌이 깔려 있었고, 너머에는 억새들이 줄지어 흔들리고 있었다.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조약돌을 하나 주워 손에 쥐어 보았다. 체온처럼 따뜻한 기운이 마음을 온화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해운대로 돌아오는 길, 아끼는 무엇을 두고 온 것처럼 자꾸 마음이 간절곶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