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pg) | 함정임
한국어문학과 교수 |
종은 4시에 울리기로 되어 있었다.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방인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창공의 종탑과 종루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첫 타종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세 개의 아치형 종루와 종탑에 크고 작은 종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예종이 울리기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 들려오는 종소리에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내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유독 종소리에 얽힌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나에게 추억이란 낯선 곳에서 겪은 일들과 소설이나 영화, 또는 그림 속에서 만난 장면이 포함되었다. 해질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들었던 범종각의 종소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런던 사람들에게 시간 감각을 일깨워주던 빅 벤의 종소리, 그리고 반 고흐가 숭배했던 밀레의 그림 ‘만종’의 세계까지.
하늘은 흐렸고, 바람은 수도원 뜰의 나무 잎사귀들을 애무하듯 흔들고 지나갈 만큼 기분 좋게 불었다. 내가 종소리를 기다리며 서 있는 곳은 러시아 수즈달의 성 에우티무우스 수도원. 수즈달은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200㎞ 떨어진 천년 고도(古都). 나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중세 유적지인 블라디미르를 거쳐 막 그곳에 도착한 참이었다. 오후 4시에 러시아 최고의 종치기 장인이 종을 치는 벨 세리머니가 있다는 정보를 접했고,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종루가 가장 잘 보이는 수도원의 뜰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종소리가 들리기 직전, 귀가 솔깃하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뜨거운 느낌이 좋았다. 오랫동안 런던에 살아서 종이 울리기 직전의 예감과 종의 울림 단계를 정확하게 구별해내던 <댈러웨이 부인>의 설렘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정지의 순간, 빅 벤이 시종(時鐘)을 치기 직전의 (중략) 조마조마함. 아, 마침 종이 치네! 종소리가 퍼져나간다. 음악적인 예종(豫鐘)이 울리고, 이어서 시종이 친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종소리가 겹겹이 묵직한 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흩어져간다.”
드디어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예종이 은은하게 몇 번, 이어 주종(主鐘)이 분명한 강도와 간격으로 울렸다. 종을 치는 사람은 사제로 매년 러시아의 종치기 경연에서 우승한 장인이었다. 그는 손과 발은 물론 온몸으로 19개의 종을 울리며 한 편의 아름다운 종소리 음악을 연주했다. 주종의 힘찬 메아리 속에 실바람 따라 들려오는 실로폰 소리처럼 잔종들이 여리고 부드럽고 매끄럽고 경쾌하게 울렸다. 종소리 연주는 8분간 계속되었다.
세상의 종소리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알리고 사라진다. 아름다움을 깨닫는 순간 덧없음이 덮쳐온다.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길, 종소리가 울리기 직전 가슴이 벅차올라 뜨거워졌던 순간을 상기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고, 오후 4시가 되면 수즈달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