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pg) | 함정임
한국어문학과 교수) |
모스크바강에서 바라본 세상은 붉은 노을 천지였다. 강으로 나를 이끈 것은 아르굴이었다. 아르굴을 만난 것은 크렘린궁 길 건너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동아시아센터에서 개최된 한·러 국제문학심포지엄에서였다. 심포지엄 행사가 끝나자 저녁시간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여름 저녁은 대낮처럼 환했다. 당장 거리로 나가 걷고 싶었다. 모스크바를 활보하기 위해서는 영어나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아르굴이 선뜻 옆으로 다가와 섰다.
모스크바에서 나는 두 발로 걸어서 가보고 싶은 데가 많았다. 제일 먼저 도스토예프스키가 태어난 마린스키빈민병원이 떠올랐다. 이어 푸시킨의 신혼집과 빅토르최를 기리고 있는 아르바트 예술거리, 러시아 오페라와 발레 무대인 볼쇼이극장, 체호프와 고골이 묻혀 있는 노보데비치 묘지, 800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국립도서관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머릿속에서 출몰했다.
아르굴은 모스크바국립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여학생이었다. 열여덟 살 소녀라고 하기에는 외국어 구사 능력이 뛰어났다. 나는 이번 러시아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 동안 이탈리아, 터키, 프랑스, 멕시코, 쿠바, 인도,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한국어문학을 전공하는 현지 학생과 연구자들을 만나왔다.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 나는 아낌없이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외국문학도에게 현장 언어와 감각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나 역시 오래전 외국문학도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뜻밖에도 아르굴은 시베리아 북부 출신이었다. 시베리아라면 나에게도 약간의 추억이 있다. 지난해 여름 시베리아 중부 중심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체험했고, 바이칼호수 답사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외국문학도였다는 것, 그리고 시베리아 땅을 밟아본 적이 있다는 것으로 아르굴과 나는 만나자마자 친밀해졌다. 우리는 가능한 동선(動線)을 그려보고, 교정을 벗어나 지하차도를 건너 크렘린궁 앞으로 향했다.
뜰에는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풀밭에 학생들이 앉거나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광장과 분수대, 산책로에는 관광객들이 무리 지어 이동했다. 아르굴과 나는 그들 사이를 유쾌하게 걸어 나갔다.
크렘린궁에서 붉은광장, 이어 성 바실리카 성당에 이르도록 우리는 한 가지 일에 열중했다. 아르굴의 한국 이름 짓기였다. 아르굴의 친구들은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굴은 작가인 내가 자신의 한국 이름을 지어주기를 희망했다. 나 역시 대학 시절 프랑스 이름을 가진 적이 있다. 보통 이름자와 유사한 발음 또는 성정(性情), 이미지에 맞는 이름을 선택했다. 여러 한글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고 뜻을 새겨보다가 아연(雅然)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모아졌다.
모스크바국립대 동아시아센터에서 모스크바강에 이르도록 아연과 나는 다섯 시간을 함께했다. 헤아려보니 산책이라기보다 무려 6㎞에 육박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두 뺨이 조금 상기되었을 뿐, 전혀 힘들지 않았다. 다리 한가운데에서 붉은 노을이 깃든 모스크바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아르굴이 아연이 되기까지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