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pg) | 임석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
오늘날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마틴 셀리그만과 동료들은 1960년대 개를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그들은 24마리의 개를 세 집단으로 나누어 상자에 넣고 각각 다른 환경을 제공했다. 제1집단의 개에게는 코로 레버를 누르면 전기충격을 스스로 멈출 수 있게 했다. 제2집단은 아무리 레버를 눌러도 전기충격을 피할 수 없는 환경이 제공됐다. 제3집단은 비교집단으로 상자 안에 있었으나 전기충격을 주지 않았다. 24시간 이후 세 집단 모두를 새로운 환경에 옮겨 놓고 전기충격을 주었다. 세 집단 모두 상자 중앙에 있는 담을 넘으면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결과는 제1집단과 제3집단은 중앙의 담을 넘어 전기충격을 피했으나 제2집단은 전기충격이 주어지자 피하려 하지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전에 피할 수 없는 전기충격을 받은 개들은 후속 실험에서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이 학습된 것이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
삼성엔 의문 제기하지 않고
엘리엇만 비판하는 한국 사회
재벌 권력에 무기력 학습된 것
'해외 투기펀드 놀이터' 주장 전에
왜 그렇게 됐는지부터 생각해야
'학습된 무기력' 이론은 이후 다양한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치 수용소의 포로들에게 '여러분은 이제 자유입니다'라고 하자 그 포로들은 그저 몸을 움츠린 채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부모로부터 학대당하는 어린아이들에게도 피해 상황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무기력과 체념 현상이 발견된다고 한다.
우리는 최근 전개되는 제일모직-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언론과 시민단체가 재벌의 반복되는 권력 앞에서 얼마나 많은 무기력을 학습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 사회가 '학습된 무기력'에 빠졌다고 보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합병 당사자인 삼성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합병을 반대하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왜 '나쁜 놈'인가를 모두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한국이 해외 투기펀드의 놀이터가 되었다고 겁을 주고, 그렇기 때문에 해외 '먹튀 자본'에 맞서 우리의 대기업을 방어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엘리엇을 투기세력이라고 단정 짓고 주주총회에서 코를 눌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왜 합병을 하려고 하는가.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시너지 효과를 주장한다. 이번 합병으로 패션·식음·건설·레저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삼성 측에서 내세운 합병의 경제적 동기와는 대조적으로, 이번 합병을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작업으로 보고 있는 시각이 있다. 현재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은 제일모직의 최대주주이지만 삼성물산 지분은 없다. 그런데 삼성물산은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지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재용 부회장이 제일모직의 최대주주니까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할 수 있다면 삼성물산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
우리나라가 해외 투기펀드의 놀이터가 되었다고 주장하기 전에 우리가 왜 놀이터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한국의 재벌이 아주 작은 지분을 가지고 주주들의 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엉성한 지배구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제 시장은 감각적으로 재벌의 경영승계 과정에서 발생하게 될 허점을 기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엘리엇이 기업의 실질적 가치 창출이나 사회적 기여와는 상관없이 단기적 주가 상승을 노린 기업 사냥꾼이라고 욕을 한다. 그러나 삼성물산의 주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합병을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것이야말로 기업 사냥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1996년 삼성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낮은 가격에 주주 우선으로 발행해 이재용 부회장은 투자 원금의 무려 733배에 이르는 상장차익을 취했다. 내가 하면 투자, 남이 하면 투기인지 묻고 싶다.
옛 속담에 선비는 '배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고 참외밭에서 신발 끈을 만지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배와 참외를 훔치려 한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 싫기 때문이다. 이번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은 아무리 보아도 배와 참외를 서리하려는 모습으로 보인다. 엘리엇이 외국계 회사라서 언론, 정부, 그리고 국민의 애국심마저 장악한 삼성그룹의 막강한 힘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엘리엇의 주장이 전부 옳은 것만은 아닌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한국의 실정에 어두워 재벌 무서운 줄 모르는, 그래서 아직은 무기력을 학습하지 않는 엘리엇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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