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pg) | 함정임
한국어문학과 교수 |
서울 용산역에서 호남선 KTX를 타고 광주 송정역에 내린 것은 오후 3시 경이었다. 공주, 정읍이라는 지명이 보이는가 싶더니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채 두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광주행 KTX에 오르면서 가슴이 뛰었다. 십여 년 전, 한국에서 처음 KTX가 개통되었을 때, 부산행 플랫홈으로 뛰어내려가면서 흥분과 설렘으로 전율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난생 처음 파리에서 초고속 열차에 발을 올려놓던 순간, 열차에 실려 쏜살같이 드넓은 구릉과 평원을 달려갈 때 기분좋게 압도당했던 속도감도 이어 떠올랐다.
그날 이후, 나는 수시로 초고속 열차를 탔고, 여러 날 여러 국경을 통과해 다시 파리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지도를 사랑했고, 지도에 별처럼 박혀 있는 이름들을 사랑했고, 지명과 지명을 이어주는 열차를 열렬히 사랑했다. 지도책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행복하게 꿈꿀 수 있었다. 열차는 지도에 새겨져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들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지도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글자를 해독하면서부터였다. 놀잇감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나는 막둥오라버니의 어깨너머로 문자를 깨우치기도 전에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선과 색에 이끌렸다. 우리는 밤마다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지도책을 펼쳐놓고 지명 찾기에 열중했다. 지도에서 원근법을 헤아려 볼 수 있게 될 즈음, 나는 지도의 선과 색을 따라 현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열차들이 내 머릿속 상상과 현실의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멀리 또는 가까이, 꿈꾸고 움직일 때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공간은 반드시 시간과 함께한다는 것을,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호남선 KTX는 초행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나는 서울에서의 일정을 마치자마자, 용산역이 아니라 서울역에서 경부선 KTX를 탔을 것이었다. 부산의 대학에 재직하게 되면서 서울-부산 간 KTX 이동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날 나는 광주송정역과 광주역을 거쳐 화순 산속에 있는 숙소까지 찾아가야 했다. 다음날부터 부산 문청들과 함께 광주와 광주 인근을 답사할 예정이었다. 공주, 정읍 지나 광주에 이르도록 나는 저녁에 있을 문청들과의 재회에 대해, 다음날 그들과 함께 5·18 민주묘지에 갈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한 달 전부터 꿈꾸어온 일이었다.
부산의 문청들이 내게 찾아와 광주 인근으로 문학기행을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나는 그들이 가고자 하는 일정표를 들여다 본 뒤, 그들에게 되물었다. 누군가, 그러니까 우리가, 아니 내가 광주에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 물음에 그들은 표적을 빗나간 화살을 바라보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무살 어름의 그들에게 광주란 역사 교과서 속의 한 페이지 또는 한 단락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내게 광주란 역사이기 전에 여전히 현실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살아 숨쉬는 현장이었다.
그들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 난해한 과제처럼 여겨졌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누군가, 그러니까 예를 들면 문학도가 광주에 가려거들랑 적어도 지켜야 할 예의로서 한번쯤 되새겨야 할 소설들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임철우 ‘봄날’에서 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까지.
광주에서 부산에 이르는 길, 며칠 전국을 감행했음에도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매 순간 긴장하고 있던 탓이었다. 버스가 낙동강을 건너면서 부산의 저녁 불빛이 꿈결처럼 시야 가득 들어왔다.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내가 서울 용산역에서 광주 송정역에 이르는 호남선 KTX에서 숨 쉬기가 불편했던 연원을 환기했다. 스무살 어름의 문청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 인식과 나의 그것이 광주라는 시공간 앞에서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5·18 민주묘지를 돌아보는 중에 풀기 막막했던 부담감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신기루처럼 가물거리는 불빛 속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5·18 민주묘지에 섰을 때,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에 맞서 그들과 내가 한순간이나마 온몸으로 간절했다는 것이 선물처럼 여겨졌다. 오월, 광주와 함께 한 하루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