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신문/세상읽기] 내일을 위한 시간 - 전성욱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5-02-23 오후 4:17:04
   대외협력과 / 조회 : 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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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세상읽기] 내일을 위한 시간
- 전성욱 국어국문학과 교수

 

 



 
 
   
 

전성욱
국어국문학과 교수

  누군가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안은 영혼을 일깨우는 통각의 정념이기도 하다. 이 변덕스러운 지상에서 영원한 평안을 누리며 완전히 만족하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불안은 차라리 평안의 전제 조건이다. 불안이 찾아올 때 평안을 회복하기 위해 궁리를 하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그 불안을 생의 의지로 비약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평안의 회복을 궁리할 여유도 없이 불안이 연이어 공습할 때, 그것은 생의 의지가 아니라 영혼을 잠식하는 파괴의 정념이 된다. 현대인의 불안에 관련된 담론과 학설들은 무수하지만, 여기서 감히 그것들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한 편의 영화를 우회해 불안이라는 개인의 심사를 공적인 차원에서 언급하려 한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이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심심찮은 한국의 영화 시장은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 실속은 대단히 천박하다. 스크린의 개수는 늘어났으나 몇 개의 흥행 영화가 그 스크린들을 독점함으로써 진지한 여러 영화가 개봉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역설. 그러니까 다르덴 형제의 신작이 도착했다는 소식 앞에서 내가 느낀 조급함이란, 저 흥행작들의 독점 속에서 그 영화가 언제까지 상영될지를 알 수 없는 안타까움과 초조함이었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은 예의 그 삶의 불안을 파고든 영화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여주인공 산드라의 복직을 앞두고 그 회사에서는 이상한 투표가 벌어진다. 회사 동료들은 그녀의 복직과 1000유로의 보너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동료들은 고민 끝에 동료를 배반하고 보너스를 선택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산드라는 그 투표가 공정치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고, 사장을 설득해 가까스로 재투표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월요일의 재투표를 앞두고 남은 시간은 겨우 이틀. 산드라가 그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을 보내며 벌이는 사투에 가까운 시간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열여섯 명의 동료를 찾아다니며 과반을 설득해야만 복직을 할 수가 있다. 그 설득을 위한 만남은 결코 용이하지 않으며, 부탁과 애원을 반복하는 가운데 마음의 상처와 위로를 넘나들던 산드라는, 극도의 불안으로 흔들리다 급기야 수면제를 과다복용하기까지 한다.

  드디어 월요일이 되었고 투표가 이루어졌다. 열여섯 명의 절반인 여덟 명의 동료가 그녀의 복직을 선택했지만 반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장은 복직에 실패한 산드라를 불러 그 열정에 대한 보상으로 계약직 직원의 계약이 끝나는 대로 그녀를 복직시켜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산드라는 자기의 복직 때문에 계약직 직원의 계약이 거부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사악한 호의를 단번에 거절한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는 웃음을 되찾고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 사흘 동안의 시간은 산드라가 그녀의 개인적인 불안을 앓으면서 공적인 의욕을 깨우치는 단련의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간이 바로 '내일을 위한 시간'이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미혹에서 벗어나 공적인 대의에 이르는 이런 식의 서사는 어쩌면 대단히 진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상투적인 이야기의 유형학에 갇히지 않고 깊은 감동과 함께 어떤 진정성에 육박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 설득의 지난한 시간을 깨우침이라는 극적인 반전의 순간을 위해 소비하거나 소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산드라가 동료들 한 명 한 명을 만나는 과정은 그들 각자의 진솔한 삶들을 아프게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바로 그 만남의 시간은 그저 주인공의 정신적 각성 내지는 성숙을 위해 봉사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삶을 목격함으로써 자기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공적인 삶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보기에 동료들의 민낯을 보는 그 생생한 만남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그녀가 내리는 단호한 거절은 충분히 설득력을 얻는다. 그런 거절은 '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앞에서 불안의 극한을 견뎌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결단이다. 그러나 대체로 불안보다는 평안을 바라는 우리들은 타인의 민낯을 바라보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의 추한 민낯을 숨기기에 여념이 없다. 취업 실패자와 실업자 그리고 비정규직의 울분과 적의를, 그러니까 그들의 '불안'을 자기 '평안'의 알리바이로 삼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서로의 민낯을 마주하며 서로의 불안을 이해하는 우리 모두의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2015.2.17.(화) 국제신문 본지 18면 / 기사 전문 보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