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jpg) | 유영현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교수 |
20년 전 의예과에 「의학과 철학」 등 인문학 교과목을 개설할 때 역풍을 많이 받았다. 내외에서 “의과대학에서 철학을 왜 배우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이미 지난 세기 중엽부터 의과대학에서의 철학 수업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한 현대의학 교육과정에서, 철학 교과목을 위한 자리를 내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이 많이 변하였다. 여러 대학들이 의료인문학 과정을 확충하고 있으며 의철학을 교과목으로 신설하여 가르치는 의과대학들이 늘고 있다.
최근 의철학 관련 학문이 부흥기를 맞았지만 고대로부터 의학과 철학의 간극은 그리 넓지 않았다. 고대의학이 자체로 철학적 요소를 포함하였을 뿐 아니라 수 많은 과거 철학자들은 의학을 철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보았다. 고대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신들을 영혼을 치료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는 의학을 지식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라고 생각하였다. 현대 들어서는 비트겐슈타인과 그 추종자들이 철학을 일종의 의미치료로 여겼다.
철학자들의 기호를 자극한 의학적 주제는 다양하였다. 육체와 마음의 관계는 전 역사 기간 동안 철학적 주제였다. 생기론과 기계론도 주요한 주제였다. 생기론은 생명현상의 유기적 과정 자체가 특이한 자율성의 결과로 보고 합목적성을 인정하는 견해이다. 반면 기계론은 생명현상이 무기물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을 기초로 한다는 견해이다. 철학자들은 이 두 이론의 상대적인 비중을 놓고 늘 고민하였다.
건강과 질병을 정교하게 규범화하는 문제 역시 철학적 주제였다. 사실 건강/질병이라는 개념 쌍은 오랜 철학적 대립을 이끌어온 거짓/참 개념보다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건강과 질병이 뭐 그리 대단한 철학적 주제인지 일견 의문스럽지만 건강한 상태는 무엇이고 질병상태는 무엇인가는 예나 지금이나 해결되지 않은 숙제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두사람은 베르나르와 깡귈렘이다.
베르나르는 현대 의학 성립과정에 주요한 주춧돌을 놓은 “실험의학의 아버지”다. 베르나르는 정상과 질병의 차이를 정량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그는 병적상태란 정상적 현상의 강화나 약화 혹은 과장, 부조화라고 여겼다. 그에 의하면 병리적 상태는 정상상태와 정도의 차이를 가질 뿐이다.
반면 프랑스의 의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깡귈렘은 질병이 단순히 정상상태가 증가하거나 감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베르나르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어떤 사건이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해서 그 사건의 고유성이 부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직시하며, 그는 질병이 증상의 총합이 아니라 기능적 총체성의 또 다른 모습이며, 유기체가 자신의 환경에 대하여 행동하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건강과 질병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천명하며 정상이 병리적인 것의 토대라는 것을 거부하였다.
의학자들이 질병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동안, 철학자들은 그들의 기호에 꼭 맞는 이 주제를 두고 질병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탐구한 것이다. 특히 서구사회가 감염병 시대에서 만성질병 시대로 넘어가면서, 질병을 예방적으로 다스리게 되자 건강과 질병은 과거보다 개념지우기 더 어려워졌다. 고혈압은 치료 대상이기는 하지만 이를 질병으로 볼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는 답이 쉽게 나올 수 없다. 정신의학에 대한 논쟁은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였다. 정신질환 측면에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질병인가에 대한 답은 지금도 공전할 뿐이다.
요즈음 의학도들은 철학이 들려주는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건강이고 무엇이 질병이냐는 질문에 답을 잘하게 되었을까? 아니다. 정상과 질병에 대한 철학의 논쟁을 배울수록 답은 더 희미하여 진다. 다수의 동서양 철학자들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의철학의 가장 큰 가르침은 이 파라독스일지 모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