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신문/인문학 칼럼] 보수동 책방골목의 가치 - 이국환 문예창작학과 교수 2014-12-19 오전 9: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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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인문학 칼럼] 보수동 책방골목의 가치
- 이국환 문예창작학과 교수

 

 

한국전쟁 이후 탄생…당시 지식 유통 담당
인터넷 서점으로 위기…유럽의 독서 마을처럼 문화공간으로 조성해야


 
 
   
 

이국환
문예창작학과 교수

  프랑스 아비뇽 거리를 걷다 보면 어김없이 책방골목을 만난다. 길과 길이 만나듯 골목은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줄지어 나타나는 책방들이 미로 같은 골목에 가득하다. 아비뇽 유수로 세계사를 배울 때마다 등장하는 작은 도시에 이토록 많은 책방이 살아남은 것이 신기하다. 여름이면 아비뇽 연극제가 열리고, 이 축제를 위해 세계의 관광객들이 아비뇽을 찾는다. 문화 축제 하나가 도시를 바꾸고 문화의 힘은 도시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영국의 헤이온와이는 주민 천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일 년에 백만 권 이상의 책이 팔리고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특히 6월이면 책 축제가 열리고 이때 마을 안의 모든 민박이 예약 마감될 만큼 성황을 이룬다. 헤이온와이를 만든 사람은 리처드 부스로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법률가의 길을 가지 않고 부모가 살던 헤이 마을에 헌책방을 연다. 다른 물건과 달리 책은 헌것이라 하여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쇠락해가던 궁벽한 시골 마을이 책을 좋아하는 한 젊은이의 꿈으로 재생된 것이다. 마을 골목마다 늘어선 책방은 각각 실내장식은 물론 주로 다루는 책까지 개성이 뚜렷하다. 어떤 곳은 추리소설이 가득하고, 어떤 곳은 명상서적을 주로 다루며, 또 어떤 책방은 어린이 책을 전문으로 진열한다. 벨기에의 르뒤도 주민 400여 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골목마다 서른 곳이 넘는 책방이 있고 그 골목을 누비며 사람들은 책 문화에 흠뻑 빠진다.

  아비뇽, 헤이, 르뒤뿐 아니라 이탈리아 몬테레지오나 프랑스 앙비에를 등 책방골목 혹은 그러한 골목으로 이루어진 책마을은 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다. 그 축제 같은 책 문화의 현장을 볼 때마다 나는 부산의 보수동 책방골목을 떠올린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용두산공원 등 부산 원도심의 명소를 찾는 관광객들이 지척에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에 간혹 들르기도 하지만, 소란스레 왔다 부산하게 사진 찍고 가뭇없이 사라진다.

  한국전쟁 이후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궁핍한 시절, 보수동 골목에는 헌책을 팔고 사는 노점들이 하나둘 들어섰고 자연스레 책방골목이 형성되었다. 피란민들이 주로 지금의 원도심 주변에 정착하였기에 구덕산 자락 보수동 뒷산으로 노천교실, 천막교실이 들어서면서 보수동 골목은 항상 학생들과 교사들로 붐볐다. 자신이 읽던 책을 팔고 필요한 헌책을 싼값에 사면서 지식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내가 학생일 때 용돈이 모이면 배낭을 메고 보수동으로 달려갔고 해가 질 때까지 보물을 캐듯 헌책 더미를 뒤졌다. 단골 책방 주인아저씨는 도서관 사서보다 서지 정보에 밝았고, 책을 보는 안목은 어떤 독서전문가도 따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도 그 책방을 지키고 있는 목소리 우렁찼던 아저씨는 이제 머리가 하얗게 셌다. 당시 보수동 헌책방에서 문예지는 철 지난 잡지로 분류되어 권당 30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현대문학,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문학사상, 동서문학, 외국문학 등 읽고 싶은 책들을 배낭 가득 사와 마음껏 읽었다. 철학, 역사, 예술, 인류학 등 헌책방에는 없는 책이 없었고, 당시 공공도서관이 미비했기에 책에 대한 갈망으로 보수동 헌책방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도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를 중심으로 가을이면 문화 행사를 열며 노력하고 있지만, 독서 인구의 급감과 인터넷 서점의 등장, 헌책을 꺼리는 풍조까지 겹쳐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의 책방골목이 그러하듯 이제 사람들은 그저 책만 보러 책방을 찾지 않는다. 유럽의 책방골목은 여유롭게 걷고, 머무르며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겨울이면 광복로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로 사람들이 붐비고 국내 최초 상설 야시장인 부평깡통야시장까지 행렬이 이어진다. 부평시장에서 길만 건너면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입지와 이야기를 간직한 역사적 의미까지 품은 곳, 이런 책방골목은 짧은 시간 자본이 투입되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곳을 책방마다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되 국내외 막론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고 싶은 문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책방 주인들이 주축인 자체 번영회의 노력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도 필요하다. 아비뇽 연극축제 덕분에 책방골목에도 관광객이 넘쳐나는 것처럼 부산국제영화제에 몰린 관광객들의 문화 욕구는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때 서울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책방이 2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책방 거리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이며, 인천 배다리 헌책방 골목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가치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이곳이 있어 부산은 영화의 도시이기 전에 책의 도시라 불러도 좋다.
 [2014.12.17.(수) 국제신문 31면 / 기사 전문 보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