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경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낮이 점차 짧아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12월로 접어들었다. 이제 곧 어둠의 정점 동지(冬至)가 다가오리라. 동짓날에는 붉은 팥죽을 쑤어 먹은 뒤 문이나 집안 구석구석에 팥죽을 뿌린다. 이러한 행위는 집안의 사악한 기운과 악귀를 쫓아낸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붉은색 곡식인 팥은 밝음, 즉 태양을 상징하며 양기를 뜻한다. 그래서 붉은 팥 알갱이는 사악한 것을 물리치기 위한 벽사(벽邪)나 주술행위에 자주 이용되었다. 동지에 끓였던 팥죽은 바로 양(陽)의 기운을 집안 구석구석에 퍼트려 어둠의 기운이 물러가기를 기원하는 행위였다.

  동지 팥죽은 양의 기운, 어둠 물리쳐

  또한 음력 섣달 그믐날에 궁중과 민가에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행했던 일종의 나례(儺禮) 의식에서도 붉은 옷, 가면 등을 사용하였다. 이들 모두 잡귀를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 양의 기운을 지닌 붉은 색 옷은 음귀를 쫓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고, 가면은 귀신을 쫓아내는 기능으로 작용하였다. 잡귀와 액운을 물리치기 위한 나례 의식에서 처용무에 사용되었던 처용탈도 주요한 가면이었다.

  이처럼 나쁜 것을 물리치기 위한 대표적인 인격체로는 처용(處容)과 종규(鍾규)를 빼놓을 수가 없다.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아아, 둘은 나의 것이나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처용의 체념과 포용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한편 종규는 중국 민간 신화와 전설 중에 나오는 귀신의 일종으로 귀왕(鬼王), 귀웅(鬼雄)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렸다. 종규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많이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 현종이 여산에서 무예를 연마하고 궁으로 돌아온 후 병석에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소귀(小鬼)가 나타나 현종이 사랑하는 여인 양귀비의 향주머니를 훔치기도 하고, 현종의 옥피리를 불기도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현종이 큰소리로 신하를 부르자 대귀(大鬼)가 나타나 소귀를 잡아 두 눈을 파내고 산 채로 삼켜 버렸다.

  현종이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묻자 "저는 무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자살한 종규입니다. 폐하를 위하여 천하의 사악한 모든 것을 없애드리기로 맹세하였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현종은 그 신기한 꿈을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인 오도자(吳道子)에게 그리게 하였고, 다른 신하에게도 명하여 각 가정에서도 종규의 초상화를 붙이도록 천하에 공포하였다.'('몽계필담')

  이처럼 종규의 모습은 널리 퍼져 사악한 것을 막아내는 벽사 신앙의 모티브가 되었다. 눈이 부리부리한 얼굴에 털이 많고 힘센 근육질의 종규 모습이 동아시아지역의 그림에 이미지로 정착한다. 아마도 종규의 이미지는 당나라 이후 중국 내륙에서 유행하여 점차 그 기능이 확산되면서 퍼졌을 것이다. 현재 한국·중국·일본 지역의 산수화, 인물화, 불화 등에 종규 그림이 남아 전하고 있다.

  처용·종규는 벽사 신앙의 모티브

  동짓날 팥죽이 그저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되듯이 악귀나 요괴를 쫓는 처용과 종규의 이미지 또한 세시풍속의 쇠락과 더불어 점차 잊혀 간다. 그렇지만 삶에 불현듯 찾아오는 액운을 경계하는 우리의 오래된 풍습은 화석처럼 현대인들의 생활 주변에 아직도 맴돌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12월의 첫날 나와 내 주변을 뒤돌아본다. 열정적인 삶이었다면 우리의 영혼은 동백꽃처럼 붉게 빛나리라. 자신의 붉은 마음이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강력한 부적이 되어 나와 주변이 안온해지기를 기원한다.